세계인의 스포츠 제전 올림픽의 모토가 127년 만에 바뀌었습니다. 기존의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에 ‘함께하면 더 강해진다'는 의미의 ‘다 함께’가 추가 돼 ’Faster, Higher, Stronger – Together’로 변경됐습니다. 1894년 근대 올림픽 창시 이후 고난과 역경을 값진 승리로 승화시킨 역대 올림픽의 영웅들 컬처 IN에서 짚어봅니다.
Highlights
- 올림픽 모토 127년 만에 ‘다 함께’ 추가…세계 유대감 조성
- 150cm ‘작은 거인’ 디아스… 필리핀에 97년 만에 첫 금메달
- IOC, 1936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한국의 영웅'
- 맨발의 에티오피아 마라톤 영웅 아베베…6.25 한국 전 참전
주양중 PD(이하 진행자): 150cm ’작은 거인’ 하이딜린 디아스가 근 백여 년 만에 필리핀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쓰는 역사적인 순간을 연출했죠?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조국에 안기면서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는데요.
유화정 PD: 필리핀이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1924년 이후 97년 만의 첫 금메달로 장거이자 쾌거였습니다. 디아스는 용상 3차 시기에서 127㎏을 번쩍 들어 금메달을 확정한 뒤 멈추지 않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 내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디아스는 26일 역도 여자 55㎏급 A그룹 경기에서 인상 97kg, 용상 127kg으로 합계 224kg을 들어 중국의 랴오추윈을 1kg 차로 제치고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150cm의 단신으로 자신의 몸무게보다 4배 이상 많은 바벨을 들어 올린 겁니다.
주양중 PD: 필리핀 공군 소속이죠. 디아스는 시상대에 올라 국기를 바라보고 거수 경계를 하며 또 한 번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는데, 올림픽 4 번째 도전만에 금메달의 한을 푼 것이라고요?
유화정 PD: 디아스는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필리핀 여자 역도 선수 중 최초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습니다. 2012년 런던에 이어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필리핀 역도 사상 첫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지만 은메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5년 만인 2020 도쿄올림픽에서 4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시상대 맨 위에 오르며 필리핀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됐습니다.
진행자: 지독한 가난을 역도로 극복한 ‘물지게 소녀’ 디아스의 역도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고 알려졌는데, 실제로 필리핀에선 그의 삶이 단막극으로 제작되기도 했죠?
유화정 PD: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디아스는 지독한 가난 탓에 어려서부터 물 40ℓ를 지고 수백 미터를 걸어야 했습니다. 장래 희망이었던 은행원의 꿈을 접고 역도에 입문해서도 디아스는 훈련 경비가 늘 부족해 대기업과 스포츠 후원가들을 찾아다니며 금전적인 지원을 요청해야 했는데요.
지난해 2월에는 중국인 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말레이시아로 전지훈련을 떠났지만,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체육관 출입이 통제됐고, 이후 수개월 동안 숙소의 좁은 공간에서 역기를 들어 올리며 끝까지 금메달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진행자: 인생 역전(逆轉)이란 말이 있죠. 진정한 인생 역전은 자기 인생 역정(歷程)의 모든 순간순간을 꿋꿋이 잘 헤쳐 나온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Philippines' Hidilyn Diaz reacts while competing in the women's 55kg weightlifting competition during the Tokyo 2020 Olympic Games Source: AP
유화정 PD: 디아스는 금메달 수상 후 인터뷰에서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신이 준 모든 역경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며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우리는 필리핀인이기에 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진행자: 흔히 ‘올림픽의 꽃’하면 육상을 떠올리죠.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다 함께’ 올림픽 정신은 육상에 딱 맞는 구호이기도 한데요. 근대 올림픽의 역사에서 육상은 무수한 영웅들을 배출해냈습니다. 그 대표 사례들을 먼저 짚어보죠.
유화정 PD: 1894년 쿠베르탱 남작의 근대 올림픽 창시 이후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올림픽에서 그리스 목동 스피리돈 루이스가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근대 올림픽의 태동을 알렸습니다.
1920년대 '날아다니는 북유럽인'으로 명성을 떨친 핀란드의 파보 누르미는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부터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회까지 모두 9개의 장거리 금메달을 수확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민족의 한을 안고 달린 고 손기정 선생도 올림픽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아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유니폼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는 영예의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진행자: 최근 도쿄올림픽 주경기장 주변에 위치한 일본 올림픽박물관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수를 역대 일본인 금메달리스트를 소개하는 코너에 일본인처럼 전시한 것이 드러나 공분을 샀는데요?
유화정 PD: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는 국제무대에서 “손기정,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IOC 홈페이지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은 Kitei Son(기테이 손·일본), 동메달은 Shoryu Nan(쇼류 난·일본)으로, 손기정 남승룡 선수 모두 일본인으로 표시돼 있습니다.
한국의 지속적인 요구에도불구하고IOC는 과거 식민 지배를 받은 아시아·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 선수들의 국적을 모두 변경하려면 혼란이 초래된다는 이유로 변경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Sohn Ki-jeong, a marathon gold medalist at the 1936 Berlin Olympics Source: AP
진행자: ‘역사는 있어도 국가가 없는’ 나라 없는 설움의 36년을 돌아볼 때 국력 신장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유화정 PD: 베를린 올림픽시상식 사진에서 손기정 선수는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는 묘목으로 일장기를 애써 가리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우고 손기정의 금메달 소식을 보도했는데, 일명 일장기 삭제 사건입니다. 이로 인해 8명이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고, 동아일보는 9개월간 정간 조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한국은 손기정 선수의 첫 금메달 회득 이후 황영조, 이봉주 선수가 메달 릴레이를 이어갔죠?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이봉주 선수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마라톤의 슈퍼스타로 우뚝 섰습니다. 금메달을 획득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시아 투과니와 아쉽게도 단 3초 차이였는데, 역대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소 1·2위 격차였습니다.
이봉주 선수가 은퇴한 이후에는 마라톤을 비롯한 육상 부문에서 국제 대회의 입상권 선수가 좀처럼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점에서 이봉주 선수는 사실상 "한국 마라톤·육상계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행자: 마라톤 하면 누구보다 먼저 거론되는 이름이 있죠. 맨발의 신화를 이룬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 코밑수염에 깡마른 체격으로 특히 한국에 굉장한 인상을 준 마라톤 영웅이죠. 수차례 방한했고, 무엇보다 6.25한국전 참전 용사로 더 친근감을 주었는데요.
유화정 PD: 아베베는 1956년 에티오피아 전국 군인마라톤에서 첫 출전 우승하며 혜성과 같이 등장했습니다. 아베베 맨발의 신화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탄생했습니다. 맨발로 달려 결승선을 끊고도 “아직 20km는 더 달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그는 그때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단 2번밖에 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2시간 15분 17초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우면서 아프리카인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군인이기 전 아베베는 소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해발 3000m 고지대 초원에서 소를 몰면서 자연스럽게 심장과 다리 근육을 키웠던 것이죠.

Abebe Bikila of Ethiopia in the marathon at the 1960 Rome Olympics. Source: Getty Images
진행자: 당시 세계 언론은 아베베의 로마올림픽 우승을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모든 이탈리아군이 필요했지만, 로마를 점령하는 데는 단 한 명의 에티오피아군으로 가능했다.”라고 상징적으로 묘사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유화정 PD: 이탈리아는 그의 조국 에티오피아를 빼앗았던 나라였습니다. 1895년 1차 전쟁에 이어 1935년에는 파시스트무솔리니가 침공해 1941년까지 6년 동안 무단 점령했습니다.
아베베도 당시 언론을 통해 “나는 다만 달릴 뿐이다. 나는 내 조국 에티오피아가 항상 단호하고 영웅적으로 시련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며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아베베가 로마올림픽에서 돌아오는 날,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40여 리를 마중 나와 직접 그를 맞았습니다. “황제인 나보다 열 배 백배 우리 에티오피아 이름을 만방에 떨쳤다”며 왕관을 벗어 아베베 머리 위에 씌워줬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아베베는 왜 맨발로 달렸을까? 많이들 궁금해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어떤 의미 부여가 있었나요?
유화정 PD: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당시 에티오피아올림픽 대표팀 후원사는 독일의 아디다스였고 당연히 선수들에게 신발이 지급됐는데요. 아베베는 선수단에 막판에 합류했습니다.
신발 여분은 있었지만 발에 맞는 게 하나도 없어 차라리 맨발로 뛰는 게 나았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마침 아베베는 연습 때 거의 맨발로 달렸던 참이었습니다.
아베베 신화는 1964년 도쿄올림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번엔 맨발이 아닌 아식스 신발을 신고 달렸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우승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올림픽 5주일 전에 맹장수술을 하는 바람에 그는 우승후보에서 일찌감치 밀려나 있었습니다.
진행자: 올림픽 2회 연속 우승이자 2회 연속 세계최고기록 올림픽 우승이었는데, 시상대에서 에티오피아 국기는 올라갔지만 국가는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기이한 해프닝이 벌어졌었죠?
유화정 PD: 도쿄올림픽조직위가 “에티오피아 국가를 모른다”며 개최국인 일본 국가를 연주한 겁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도쿄올림픽을 끝으로 69년 2월 아베베는 다시 트랙에 설 수 없었습니다. 빗길에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지고 척추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지만 아베베는 절망하지 않고, 1년 뒤 1970년 노르웨이 25km 휠체어 눈썰매 크로스컨트리 대회에서 건재함을 보였습니다.
아베베는 마라톤 현역 시절 “나는 남들과 경쟁하여 이긴다는 생각보다 내 고통을 이긴다는 생각으로 달린다. 고통과 괴로움에 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렸을 때 승리가 찾아왔다.” “나의 적은 다른 선수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그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진행자: 고난과 역경을 값진 승리로 승화시킨 역대 올림픽의 영웅들 컬처 IN에서 짚어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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