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전 서양 음악사에서 여성 음악가의 이름을 찾는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와 같습니다. 20세기까지 유명한 음악가들은 거의 남성입니다. 왜 여성은 음악사에서 언급되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일까요? 왜 전부 남성들일까요?
물론 아주 드물게 중세 시대에도 힐데가르트 폰 빙엔, 브리지타 폰 슈베덴 같은 여성 작곡가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중세 가톨릭의 고위층 수녀였습니다. 종교적 권위를 지닌 위치에 있었기에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지요.
근대로 들어오면서 여성 음악가들의 이름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난네를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모차르트의 누나’ ‘멘델스존의 누나’ ‘슈만의 아내’ 와 같은 수식어들이 꼭 따라붙습니다. 재능은 뛰어났지만 사회적으로 여전히 숱한 제약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살았던 탓입니다.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는 신동 모차르트와 다섯 살 연상의 누나 난네를을 데리고 비엔나, 파리 등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돌며 연주여행을 다녔습니다. 난네를은 하프시코드와 피아노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며 바이올린을 연주한 모차르트보다 더 많은 연주료를 받았을 만큼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지만 그러나 당시 사회상에 비추어 여자의 신분으로서 전문적인 연주가로의 성장은 불가능했습니다. 레오폴드는 난네를이 결혼 적령기인 18세가 되자 연주 여행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고, 이후에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 살림에 전념하게 됩니다.
동생의 그늘에 가려진 비운의 천재 음악가
‘19세기의 모차르트’로 불린 펠릭스 멘델스존에게는 4살 위 누나 파니 멘델스존(1805~1847)이 있었습니다. 파니 멘델스존은 피아노 연주뿐아니라 작곡에도 뛰어났던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는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로서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는 파니 멘델스존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시작되면서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여성 작곡가'라는 진정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슈만의 아내가 된 클라라는 10대 시절부터 당대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쳤지만 남편을 위한 내조와 여덟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육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서양음악사는 오랫동안 슈만의 아내 클라라로 기록해왔습니다.
생전 400여 곡 출판한 세실 샤미나드
여류 작곡가가 극히 드문 세계음악사상 프랑스의 여류 작곡가 세실 샤미나드는 특이한 존재입니다. 세실 샤미나드(Cecil L.Chaminade,1857-1944)는1857년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8세때 이미 종교음악을 작곡할 정도로 피아노와 작곡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지만, 부모의 반대와 또한 당시 시대상황은 여성은 음악원의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샤미나드는 걸작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오페라, 발레 곡을 비롯해 살롱 풍의 피아노곡, 기악곡을 많이 작곡해 이름을 날렸는데, 그녀의 서정적인 피아노 소품과 가곡은 주로 살롱을 중심으로 연주되었습니다.
당시 살롱은 남성들이 좌우하던 콘서트 홀과는 달리 여성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집 바깥의 모든 문화적 활동은 남성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살롱은 여성 취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것이 오늘날 그녀의 음악이 살롱음악용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을 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형식, 우아한 선율, 19세기말 중상류층 여성의 취향이 듬뿍 담겨 있는 샤미나드의 음악은 그러나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들도 쉽게 연주할 수 있고, 누구나 쉽게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가장 간단한 멜로디와 형식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작품을 완성해 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작곡가라면 후세 사람이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는 것 못지않게 생전에 출판 및 연주기회를 많이 갖고 싶어하기 마련인데, 4백여 곡의 작품이 거의 모두 생전에 출판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둔 세실 샤미나드는 그런 점에서는 행운아였습니다.
서양음악사의 가려진 여성 음악가들 2부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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