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측에서는 93명, 북측은 88명이 참가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모두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데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 눈물이 흘러내릴 이번 만남에 대해 세계 각국 언론들이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희 호주 공영 SBS 도 오늘 자 기사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소개했는데요. 이 소식 살펴 봅니다.
SBS 는 기사에서 지난 2000년 부터 남북한이 총 20여차례의 이산가족상봉을 실시했는데,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양국간의 긴장이 높아지며 이산가족 상봉이 3년만에 다시 시행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산 가족 상봉은 지난 4월 판문점에서 열린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으로 다시 재게되게 됐는데, 남쪽에서 총 181명이 국경을 건너 금강산 리조트에서 북의 가족들과 상봉하게 됩니다.
참가자들은 모두 추첨으로 선정됐고, 이후에 가족들의 생존 여부가 확인된 분들에 한해 실제 상봉이 이뤄집니다.
570:1의 경쟁률을 뚫고 이산 가족 상봉이 성사되지만 그 만남이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2번의 식사와 2시간 씩 2번 총 6시간 정도만을 만나게 되는 상봉자들 중 일부는 떨어져 있는 긴 세월을 극복하지 못해 대화를 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물론 감정이 복받치는 상황 때문이기도 합니다. .
일부 상봉자는 수척한 북쪽 가족들의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기도 하는데요.
한 상봉자는 화장실에서 가슴을 치고 우는 한 여성이 ‘오지 말걸...’ 이라고 후회하는 걸 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너무나 가난한 북측 가족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2014년 형과 상봉한 김종규 할아버지는 88세인 형 김휘용 할아버지도 몸 한 쪽이 마비된 상태였다고 합니다.
김 할아버지는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았지만 조심해서 몇 가지만 물어봤다”며 “혹시 북측 가족들에게 무슨일이 생기지는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고 털어놨습니다.
6남매의 장남이었던 김휘용 할아버지는 1942년 일자리를 찾겠다고 남쪽이었던 고향 용주를 떠났습니다.
당시 김휘용 할아버지는 16살이었고 동생 김종규 할아버지는 6살이었습니다.
그때만해도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북쪽에 개발된 지역이 더 있었고, 김휘용 할아버지는 전쟁 직전 흥남의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김종규 할아버지는 “남매들 중 가장 똑똑했던 큰 형을 잃는 것은 집안의 빛을 잃는 것과 같았고, 부모님은 평생 형을 그리워했고, 기다렸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결국 형을 다시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김종규 할아버지는 “부모님은 한 분씩 큰 형을 꼭 만나라는 유원을 서로에게 넘기면서 돌아가셨고 제가 그 유언을 받아, 모든 가족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남한의 김종규 할아버지는 매주 교회에 가서 형이 건강하게 살아있기를 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SBS 는 “비록 6시간이었지만 형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축복이라고 느낀다”고 말한 김종규 할아버지의 말로, 기사를 끝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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