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 IN: 조선 시대 ‘종이 재활용’… 왕좌 그림 배접에 과거 시험 답안지?

창덕궁 인정전 어좌와 184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된 일월오봉도 병풍

창덕궁 인정전 어좌와 184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된 일월오봉도 병풍 Source: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시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뒷면에서 184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해엔 궁중 혼례복 '활옷'의 속심에서 188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된 바 있어 조선시대 ‘종이 재활용’이 추론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최대의 꿈이자 영예인 과거급제.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시와 문장에만 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 보는 눈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시대의 논술, 왕이 내는 문제를 책문이라 하고 응시생들이 작성하는 답을 대책이라 했습니다. 단순히 문장실력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최종 관문인 책문을 통해 인재를 선발했던 것이 바로 조선의 과거제도였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 탈락자들의 답안지가 무더기로 발견돼 화젭니다. 1840과거 시험 답안지가 무더기로 쏟아진 곳은 다름 아닌 병풍 뒷면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 알아봅니다. 컬처 IN 유화정 프로듀서 함께 합니다. 


Highlights

  •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 뒷면서 1840년 과거시험 답안지 발견
  • 조선 궁중혼례복 '활옷' 속심에도 1880년 과거시험 답안지로 배접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시대 종이물자 부족과 폐지 재활용 목적 추론

진행자: 182전에 치러진 조선시대 과거 시험 답안지가 병풍 뒤에서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화제인데, 조선 말기 제24헌종 시기가 되죠?  먼저 관련 소식부터 전해 주시죠.  

유화정 PD: 조선시대 대표 궁중 회화인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 병풍 뒷면에서 1840년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무더기로 발견됐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16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보존처리를 진행한 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도 병풍 틀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인 시권 27장이 발견된 건데요.

인정전이 일반 관람객들에 개방돼 바깥공기가 들어오는 환경에 노출되면서 1964년 이후 다섯 차례 보수를 거쳤지만 화면이 일부 파손되거나 안료가 들뜨고 병풍 틀이 틀어졌다는 진단에 따라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가 2016년 전면 해체하고 지난해 말까지 보존처리를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과거시험 탈락자들의 답안지를 발견한 건데, 그림을 지지하기 위한 병풍 틀에 조선시대 과거 시험 답안지를 배접용으로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1405년 창덕궁과 함께 지어진 인정전(仁政殿)은 이름처럼 ‘어진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던 인정전은 1608년 중건됐고, 이후 경복궁이 중건될 때(1868년)까지 250년 넘게 궁궐의 상징적 기능을 맡았습니다. 광해군부터 철종 때까지 창덕궁 인정전은 조선 궁궐의 핵심이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어좌와 일월오봉도
경복궁 근정전 어좌와 일월오봉도 Source: 국립문화재연구소
진행자: 일월오봉도는 그러니까 조선시대 임금이 신하들에게 국가 운영에 관한 일을 보고 받는 ‘조회’를 하던 정전의 어좌 뒤편에 놓인 병풍의 그림이죠, 국보로 지정이 있고요. 일월오봉도는 창덕궁 인정전 외에 다른 궁들의 정전에서도 찾아볼 있다고요?

유화정 PD: 일월오봉도는 창덕궁 외에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 그리고 창경궁 등에 보존이 돼 있습니다.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왕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회화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시대 고유의 문화와 사상이 담긴 독특한 양식의 그림입니다. 한마디로 임금과 태평성대한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 궁중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배경의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그림으로 이번 화제가 된 창덕궁의 일월오봉도는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금등지사’가 숨겨진 것으로 설정됐던 그림이기도 합니다.

진행자: 인정전 어좌 뒤에 설치된 일월오봉도는 4병풍으로, 크기는 가로 4m 36㎝·세로 2m 41㎝인데요.  직접 보지 않았다 해도 한자 해석대로 해와 달과 다섯 봉우리가 연상되는 그림인데, 더불어 소나무와 폭포 등이 그려져 있죠. 각각에는 어떤 상징적 의미가 담겼나요?

유화정 PD: 먼저 하늘에는 음양을 상징하는 하얀달 과 붉은 달이 있습니다. 하얀 달은 해를 뜻합니다. 그림에서 해와 달은 우주의 원리를 말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자리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중심에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오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5대 명산으로 경복궁이 있는 북한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금강산, 서쪽은 묘향산, 남쪽은 지리산, 북쪽은 백두산입니다.

이 다섯 개의 높은 봉우리는 사람이 항상 갖추어야 하는 다섯 가지 도리 즉 어질고 옳고 예의가 있으며 지혜롭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오행’의 상징적 의미를 담았습니다.

진행자: ‘신’은 유교 국가였던 조선 왕조에서 강조됐던 가치관으로 이의 영향을 받아 가훈이나 학교 교훈 등에도 널리 사용됐던 덕목인데요. 일월오봉도엔 해와 달과 다섯 봉우리 외에 좌우에는 각각 그루 붉은 소나무가 짝을 이루며 기둥처럼 서있고, 소나무 산봉우리 사이로 폭포 줄기가 쏟아지는데 완벽한 대칭 구도를 이루면서 강한 인상을 줍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나요?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 Source: 국립문화재연구소


유화정 PD: 소나무는 ‘솔’과 ‘나무’의 합성어로, ‘솔’은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나무 이름을 ‘으뜸’을 뜻하는 ‘솔’이라 고 했을 만큼, 소나무에 대한 우리 민족의 사랑은 유별했습니다.

소나무는 엄동설한의 역경 속에서도 늘 푸른 모습을 간직해 굳은 기상과 절개를 상징했고, 그 전통은 애국가 2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로 이어지기도 했죠.

붉은 소나무는 소나무 중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귀하게 생각했던 나무였던 만큼 만물을 대표하는 것으로 풀이됩니다.

붉은 소나무 뒤 높은 봉우리 사이로 폭포줄기가 떨어지면서 파도와 함께 넓은 바다가 펼쳐지는 것은 여기서 두 줄기의 폭포는 임금이 백성에게 내리는 덕으로 표현되며, 바다는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즉 태평성대를 누림을 의미합니다.

진행자: 그런데, 창덕궁 인정전 일월오봉도 복원 처리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과거 시험 답안지가 탈락자들의 답안지인지는 어떻게 아는 걸까요?

유화정 PD: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이 끝나고 그 결과가 발표되면 시권은 합격 시권과 낙방 시권으로 분류되는데, 합격 시권은 뒤에 합격증서인 홍패· 백패와 함께 영광의 상징으로서 본인에게 돌려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가보로 오랫동안 보관되었고 혹은 기증되어 박물관에 전시가 될 수 있었는데요. 그러나 불합격한 응시자의 시권은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일월오봉도 병풍 뒷면에 배접된 과거 낙방 시권
일월오봉도 병풍 뒷면에 배접된 과거 낙방 시권 Source: 국립문화재연구소
진행자: 비록 불합격 판정된 답안지이지만 당시 과거 시험의 문제를 알아볼 있는 자료이기도 한데, 어떤 문제가 제시됐나요?

유화정 PD: 윤선영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는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보고서에 수록된 논고에서 "시권의 글을 번역해 살펴본 결과 다섯 가지 유교 경전인 오경(五經) 가운데 한 구절을 골라 대략적인 뜻을 물은 과목과 사서(四書) 중 의심이 가는 구절에 대해 질문한 과목의 답안지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발견된 시권은 1840년 시행된 식년감시초시의 답안지로 확인됐는데, 대부분 두껍지 않고 고급 품질 종이는 아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참고로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른 정기 시험이고 감시 초시는 생원시와 진사시를 뜻합니다.

진행자: 고급 품질 종이는 아니었다는 부분에서 당시 종이 사용에 어려움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요. 과거 시험 답안용 종이는 부정을 막기 위해서도 물론 과거 당일에 제공이 되는 거였겠죠?

유화정 PD: 조선시대에는 왕이 친림하는 즉 직접 참관하는 특별한 시험이 아니고서는 오늘날 수능처럼 국가에서 시험지를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에 응시자 개인이 자신이 쓸 종이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과거시험장에서 쓸 답안용 종이, 시지(試紙) 구입은 원칙적으로 응시자 본인이 부담했습니다. 시험지는 처음에는 별도 규격이 없다가 응시자마다 서로 고급지에 쓰려고 경쟁이 붙기 시작하자 아예 국가에서 규격을 지정하게 됐는데요.

크기와 품질이 일정한 규격에 맞아야 했고, 또한 격식에 맞추어 인적사항을 적은 후 제출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시지로 도련지를 사용했는데, 붓이 매끄럽게 잘 나가도록 다듬이질로 종이 표면을 매끄럽게 만든 종이였습니다.

응시자들이 과거시험 하루 전 날 '시지'를 미리 사서 녹명소에 응시자로 등록하면 제출된 시지는 검사관들이 일일이 규격에 맞는지를 조사한 뒤 관인을 찍어 응시자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도련지는 붓이 매끄럽게 잘나가도록 다듬이질로 종이표면을매끄럽게만든종이였다.
도련지는 붓이 매끄럽게 잘나가도록 다듬이질로 종이표면을매끄럽게만든종이였다. Source: 국립문화재연구소
진행자: 말하자면 권력 가문 자제들이나 경제력이 풍부한 양반가의 자제들은 두껍고 질이 좋은 시지를 마련할 있었지만, 제대로 시지를 마련하지 못해 거리를 헤맬 가난한 선비들을 위한 형평성의 구제 제도이었네요.

유화정 PD: 시험 전날이 되면 시험장 근처 시장은 종이가 없어 난리가 나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1차 시험인 초시의 경우에는, 본거지와 가장 가까운 지역의 큰 도시에서 시험을 치렀기 때문에 먼 고장에서 온 지방 선비들은 미리 시험지를 준비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한양에서는 과거시험이 있는 날에는 시전의 종이 값이 20배 이상 뛰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힘든 과정의 과거 시험이 끝나고 발표가 나면 합격 시권은 본인에게 돌려주어 가문의 영광과 가보로 남게 돌려주었지만, 반면 낙방 시권은 어떻게 처리가 됐나요?

유화정 PD: 합격하지 못한 낙방 시권은 일괄적으로 호조에 옮겨져 여러 가지 용도로 쓰였습니다. 일 예로 조선 중기 11대 임금 중종실록에는 함경도 절도사가 빈한한 군사들에게 낙방 시권으로 옷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번 일월오봉도 병풍에서 발견된 것처럼 왕실에서조차 시권을 재활용한 걸로 미루어보아 조선 후기 종이 물자가 매우 부족했다는 점이 추정됩니다. 
조선시대 공주의 혼례복 형태를 잘 유지하도록 하기위해 종이심을 옷감에넣었다.
조선시대 공주의 혼례복 형태를 잘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종이심을 옷감에 넣었다. Source: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에서 과거 시험 답안지를 재활용한 사례는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 특별전에서 선보인 전통 예복 '활옷' 속에서도 1880년 과거 시험 답안지가 발견된 바 있습니다.

진행자: 조선시대 임금의 존재와 권위를 상징하는 궁중 회화 ‘일월오봉도’ 보존처리 과정에서 당시 귀했던 종이 물자와 폐지 재활용의 지혜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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