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인 피디: 지난주 금요일인 8일부터 시드니 한국 문화에서는 ‘호주 매씨 가족의 한국 소풍 이야기’라는 특별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1910년 선교사로 한국에 와 29년간 나환자들을 돌본 제임스 매켄지(매견시) 선교사와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한국 전쟁 중 부산에 일신 부인 병원을 설립해 20여 년이 넘도록 봉사한 딸 헬렌(매혜란), 케서린(매혜영) 자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지난주에는 이번 전시를 2016년 처음 세상에 내놓은 경기 대학교 소성 박물관 학예 팀장인 배대호 학예사와 매켄지 가족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들어봤는데요. 오늘은 매켄지 자매가 은퇴한 후 호주에 돌아온 뒤 30년 이상 이들 자매와 가깝게 지낸 이 두 분의 제자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바로 은퇴한 조산사(미드와이프)이자, 간호사인 멜버른의 한인 동포 김영옥 선생님이신데요. 이 분은 1968년 한국 일신 부인 병원에서 헬렌 맥켄지로부터 조산 교육을 받고 호주에 유학 와 호주 미드와이프가 됐으며, 이후 호주 남편을 만나 결혼해 호주에 정착하셨다고 합니다. 과연 헬렌과 캐서린 매켄지 자매의 은퇴 후의 삶은 어땠을까요? 김영옥 선생님 만나봤습니다.
멜버른 한인 동포 김영옥(74) 선생
- 1968년 일신 부인 병원에서 매혜영 선생으로부터 조산 교육 수료
- 1971년 멜버른 퀸 빅토리아 병원에서 3년 반 유학
- 1976년 호주로 이주해 미드와이프 및 간호사로 근무
- 매혜란, 매혜영의 제자 중 유일하게 호주에 거주하며 30여 년 이상 왕래
나혜인 피디: 김영옥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김영옥 선생: 안녕하세요?
나혜인 피디: 반갑습니다. 먼저 저희가 간단히 부산 일신 부인 병원 초대 원장이셨던 호주의 헬렌 매켄지 한국명 매혜란 그리고 간호사였던 동생 캐서린 매켄지, 매혜영 선생님, 이 두 분의 제자였다고만 소개를 해 드렸는데요. 직접 소개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영옥 선생: 저는 1967년 공주에서 간호 학교를 졸업 후 1968년에 일신 부인 병원에서 조산학을 마치고 거기에서 2년 반 근무 후 1971년 멜버른 퀸 빅토리아 병원에 와서 조산학 등 한 3년 반 동안 멜버른에서 공부한 후 부산 복음 간호학교에서 6개월 일하고 다시 1976년에 호주에 와서 정착한 다시 말해서 매혜영 선생님에게 매우 실망을 준 제자입니다.
나혜인 피디: 왜 실망을 주셨다고 이렇게 말씀하셨나요?

1971년 멜버른 퀸 빅토리아 병원에서 조산과정 중 김영옥 선생 Source: 김영옥
김영옥 선생: 제가요. 호주에서 공부하고 한국에 들어갈 때는 매 선생님 기대가 무척 컸어요. 한국에서 많은 일을 할 거라고… 그 당시에 장기려 박사님께서 매 선생님에게 일신에는 호주에서 공부한 두 사람이 있으니까 김영옥 씨는 우리 복음 간호 학교에 달라고 해서 매 선생님이 복음 간호 학교에 보냈는데 6개월 일하고 다시 호주에 오니까 기가 차서 울면서 저를 야단치던 생각을 하면은 지금도 눈물이 나와요.
나혜인 피디: 저희가 지난 시간 매 자매께서 세우신 일신 부인 병원의 놀라운 역사, 업적들에 대해서 들었는데요. 우리 김영옥 선생님께서 직접 일신 부인 병원에서 근무를 하셨으니까요. 1960년대 당시 일신 부인 병원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김영옥 선생: 1960년대는 우리나라는 무척 가난했습니다. 일신 부인 병원은 누구나 와서 잘 치료받고 돈 없는 사람들은 무료로 치료해 주는 병원으로 조산학 교육과 전문의 산부인과 전문의를 계획하는 병원이었습니다. 무척 바빴고 하나 잘 기억되는 것은 아침마다 병실에서 예배드리고 일을 시작하는 병원이었어요.
나혜인 피디:우리 매혜란 원장님, 그리고 매혜영 간호 부장님 병원에서 근무하실 때는 어떤 분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영옥 선생: 매 원장님은 아주 조용하시고 수술을 아주 잘하셨습니다. 낮과 밤 언제나 원장님이 필요한 곳에는 원장님이 계셨었어요. 매일 아침 예배 시간에 조그마한 손 풍금으로 찬송을 연주하셨고 매혜영 선생님은 아주 강의를 부산 사투리로 조리 있게 잘하셨습니다. 선생님 강의만 들어도 50%는 머리에 남았던 것 같아요. 한 번 배운 것은 실수라는 것은 인정 안 하시고 호랑이같이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큰 소리로 야단을 무섭게 하셔서 교육생들은 늘 실수 안 하려고 노력하면서 모두 근무를 하였습니다. 모든 환자를 사랑으로 대하시고 잘 치료하시는 두 분은 직원들의 존경을 받는 선생님들이었었습니다.
나혜인 피디: 우리 김영욱 선생님께서는 한국에서 조산학을 공부하셨다가 근무를 하신 뒤에 다시 호주에 오셨다가 도로 한국에 가셨는데 6개월 만에 다시 호주에 오셨다고 앞서서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그 당시에 매혜영 간호부장님께 실망을 안겨드리면서 호주에 오셨다고 아까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렇게 호주에 정착하게 되신 데는 이유가 있으셨나요?

일신 부인 병원 근무 당시 매혜영 Source: 김영옥
김영옥 선생: 제가 한국에 들어가서는 일신 병원에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부산에 있는 부산 복음 간호학교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 당시에 장기려 박사님이 매켄지한테 김영옥 선생님은 복음 간호 학교에 달라 해서 매 선생님께서 장기려 박사님한테 드린 거죠. 근데 6개월 후에 장 박사님께서 “너는 호주에 가서 두 매 선생님 딸이 돼라”라고 그래서 제가 한국 갈 때 영주권을 받고 들어갔어요. 유학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다시 오게 됐습니다.
나혜인 피디: 호주에 남아서 매 자매님들과 거의 30년의 세월을 함께 하셨는데요. 평생을 한국에서 헌신하신 뒤 은퇴 후 호주에 오셔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궁금합니다.

1973년 멜버른에서 조산학 과정 유학 중 김영옥 선생(오른쪽) Source: 김영옥
김영옥 선생: 제가 선생님 집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때 내가 놀란 것은 아마 여러분도 상상을 못할 거예요. 그 아버지가 남겨준 집. 거기에는 조그만 거실에 부어 군 두 사람도 거기다 들어가서 가장 작은 부엌, 화장실과 샤워와 세탁기가 함께 있는 조그만 곳. 그런 곳에 사시고 차도 없고 또 호주 국가에서 주는 연금을 받고 아주 사실은 그거 보고 제가 기막혔었어요. 아니 한국에서 병원장 간호부장으로 그렇게 사신 분들이 그 생활은 나한테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차츰차츰 선생님들과 지내면서 가까워지면서 선생님들이 무소유 모든 거 한국에 주시고 아무것도 안 가지고 이곳에 정착하셔서 그래도 편안하시게 사는 모습은 꼭 살아있는 성자 같았습니다.
나혜인 피디: 매 원장님, 매 선생님 이 두 분과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이 있으셨다면 이야기 해 주시죠.
김영옥 선생: 네. 이 사 형제 매 선생님 사 형제는 우애가 무척 좋았어요.
나혜인 피디: 네 자매?
나혜인 피디: 네.네자매가… 그다음에 매 일요일마다 교회 마치고 매 원장님 집에 가서 함께 커피 마시면서 얘기할 때 선생님 어렸을 때 이야기. 한 번은 자기가 옆집에 사는 한국 집에 물 떠다주고 매 선생님께서 콩나물국을 그렇게 좋아하셨대요 그래서 콩나물국 얻어먹고서는 집에 와서 엄마한테 무쟈게 야단맞았답니다. 가난한 집 가서 음식을 먹고 왔다고 그 콩나물국이 너무 먹고 싶어서 가서 물 갖다주고, 물을 머리에 이고 왔대요. 그래서 갖다주던 그런 얘기 그다음에 평양에서 공부를 할 때 기차를 타고 평양에 가던 얘기를 하시면서 평양에 있는 선교사를 위한 학교가 미국 사람들이 지었는데 그 학교가 시설도 그렇게 좋고 실력이 좋았어요. 그때 평양에 있을 때는 미국 발음을 영어로 발음을 배워 올 때 만약에 집에 와서 미국 영어를 쓰면 그렇게 야단을 맞았다고, 그래서 호주 발음을 쓸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고, 그 평양 학교에서 매 원장님은 공부도 잘하지만, 운동도 잘하고 테니스도 잘 치고, 첼로도 잘하고, 음악 피아노 못 하는 것이 없이 이렇게 다 잘하고 졸업할 때는 두 명이 2등을 놨대요. 1등은 없었고?
나혜인 피디: 수석 졸업하셨죠?
김영옥 선생: 네. 그렇게 멜번에서도 그렇게 공부를 잘했어요. 멜번 의대나 병원에서도 그래서 평양 얘기 그다음에 어렸을 때 친구들. 한국 친구들 얘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많이 했습니다. 그렇고 또 한 가지 인상 남는 건 매 원장님은 정원일을 참 좋아하시고 잘 가꾸셨어요. 그런데 꼭 정원 일을 하실 때 우리나라 남자 고무신을 신고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한국 오면은 두 선생님도 고무신 사다 드렸습니다. 그러면 되게 좋아하셨어요. 그렇게 하고 또 매 원장님이 꼭 그 선물을 주실 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하루는 ‘얘 야 너네 정원에 정말 한국 무궁화 꽃이 있어야 되지?’ 이러면서 무궁화 꽃을 주시는데 한 겹짜리 ‘이것은 정말 한국 무궁화 꽃이야’ 그래서 지금도 우리 정원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 조그만 한 것이지만은 생각하시고 그 사람이 꼭 필요한 것을 갖다가 선물 주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 가지는 한국 뉴스가 나오면은 신문에 그거를 다 올려갖고 저한테 갈 때마다 다 주시면서 한국 얘기를 하시고 언제든지 한국을 사랑하시고 그러니까 이분들은 한국 사람이었었어요. 호주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한국을 무척 사랑하고 아끼시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나혜인 피디: 우리 매혜영 간호부장님께서 2005년에 돌아가셨고 매혜란 원장님이 2009년에 돌아가셨는데요. 이후에 남겨진 사진들이 지금 9천 장이 넘는다는 얘기를 저희가 전해 들었는데 이 많은 자료들을 어떻게 한국에 넘기게 되셨나요.
김영옥 선생: 매 원장님은 아버지가 남기신 엄마 아버지가 남기신 집에 살았었는데요. 교통사고를 당하신 후 기억력이 좀 상실하셔서 막냇동생 쉴라의 도움으로 사시다가 양로원으로 가셨어요. 그 후 쉴라가 뇌졸중으로 양로원에 가면서 매 원장님이 사시던 집을 갖다가 팔아야 됐습니다. 그때 집 정리하면서 제가 늘 선생님들이 말씀하시는 그 사진이 그냥 생각이 나서 그것 좀 달라고 한국에 보내고 싶어서 그래서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그 집 정리하면서 다행히 매 원장님 방과 매 선생님 방에 있는 모든 물건 거기에 있는 물건들은 한국에 보내도 된다는 가족의 허락을 받고 빨리 모든 걸 갖다가 한국에 보냈죠. 거기에 그 사진이 있었습니다.
나혜인 피디: 정말 귀한 그 역사적인 사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버지 제임스 매켄지 그리고 어머니 메리 켈리 그리고 헬렌 매켄지, 캐서린 매켄지 왜 이렇게 매 씨 가족이 한국을 위해 헌신하셨던 걸까요? 혹시 그런 말씀 들으셨나요?

김영옥, 매혜란, 로버트 도울링(김영옥 선생의 남편 ) Source: 김영옥
김영옥 선생: 매 원장님과 매 선생님은 자기들 어릴 때 아버지가 나병 환자를 치료하실 때 아버지가 의사였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어렸을 때부터 다시 자기들은 의사 공부를 하고 간호원 공부를 한 후에 한국에 들어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호주에서 공부를 하시고 한국에 가셨어요. 매 선생님과 매 원장님은 호주에서도 굉장히 알아주는 의사와 간호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33년 동안 성자 옆에서 살았습니다. 그 선생님들 생은 무소유였어요. 자기 거 있는 거는 다 그냥 주는 그런 성격. 하다못해 돈이 들어와도 그거는 다시 또 교회에 바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쓰거나 그 무소유 삶을 선생님들이 선택해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언제나 평온했었고 우리가 보기에는 가진 것은 없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사신 분 같아요.
나혜인 피디: 끝으로 김영옥 선생님 오늘 매혜란, 매혜영 선생님, 두 분 선생님께서 들으신다고 생각하시고 한 말씀해 주신다면요.
김영옥 선생: 매 선생님 내 원장님 당신들이 남긴 만 여 장의 사진을 모두 디지털로 잘 한국에 보관됐습니다. 지금 한국과 호주에서 사진전이 열리는데 지금 선생님이 여기에 계시다면은 이 사진은 무엇이다. 이러면서 이야기해 주실 텐데 너무 아쉽고 너무 보고 싶어요. 선생님 너무 보고 싶어요.
나혜인 피디: 지금도 두 분 선생님들 생각하시면 이렇게 목이 메이시는 것 같은데요. 간호사 출신이신 멜버른의 한인 동포 김영옥 선생님 오늘 너무 소중한 이야기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영옥 선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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