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Points
- 생명을 위한 기증, 그러나 50명 자녀라는 충격적 결과
- 제도의 허점과 병원의 무분별한 정자 유통…당사자 동의 없이 국내외 유통
- 호주는 주별로 기증 가정 수 제한…빅토리아주, '기증자 추적권' 시행
- 생명과 정체성, 관계의 경계가 흐려진 시대…가족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위한 기증. 하지만 정자 기증으로 태어난 자녀가 50명이 넘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최근 네덜란드에서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생명을 품게 해주는 따뜻한 선택일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우리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다양한 물음이 따라붙습니다. 기술은 새로운 생명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그 뒤에 따라오지 못한 제도와 문화는 어떤 파장을 낳고 있을까요?
오늘 컬처인에서는 '정자 기증'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통해, 가족의 의미와 생명을 둘러싼 문화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나눠봅니다.
문화로 세상을 보는 시간 컬처인, 유화정 프로듀서 함께 합니다.
홍태경 PD: 최근 네덜란드에서는 한 남성이 자신이 50명이 넘는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적잖은 파장이 있었는데요. 어떤 이유로 정자 기증을 하게 됐고, 이후 그가 어떤 상황을 마주하게 됐는지 먼저 들어볼까요?
유화정 PD: 네, 니코 카위트(Nico Koffeman)라는 이름의 63세 네덜란드 남성입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왔는데요. 1990년대 후반 당시 30대 후반의 나이의 카위트 씨는 종교적 신념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돕고 싶다’는 의지로 네덜란드 레이던(Leiden)에 있는 난임병원에 약 50차례 정자를 기증합니다.
당시에는 난임이 증가하면서 정자 기증이 늘어나던 시기였고, 그는 자신의 기증이 다른 가정에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죠. 일부 정자는 연구용이나 배아 기증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10년쯤 지난 2004년, 그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자신이 30명 이상의 자녀를 두었다는 병원측의 연락이었는데요. 이후 추가 확인을 통해, 그의 정자로 태어난 자녀는 네덜란드에 약 25명, 해외에 또 25명 등 무려 50명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홍태경 PD: 네덜란드는 의료나 복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는 선진국으로 잘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걸까요? 조금 의외라는 생각도 드네요.
유화정 PD: 네, 많은 분들이 그렇게 느끼실 것 같아요. 네덜란드는 실제로 생식의학이나 윤리 관련 규정이 일찍부터 마련된 나라 중 하나인데요. 이번 사태는 그 규정이 있었음에도 관리 체계가 느슨했거나, 여러 기관 간 정보 공유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허점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당시에는 기증자의 정자 수요가 워낙 많다 보니, 일부 병원들이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정자를 국내외로 유통했다는 점입니다. 이건 단순히 시스템이 없었다기보다는, 윤리보다 수요를 우선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참고로 네덜란드에선 기증자 1명당 자녀 수를 25명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단지 네덜란드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생식 기증 시스템의 투명성과 신뢰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홍태경 PD: 니코 카위트씨 입장에선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것 같아요. 아이를 직접 낳은 건 아니지만, 그 존재들이 갑자기 현실로 다가온 거잖아요.”
유화정 PD: 더 놀라운 건, 그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는 겁니다. 카위트 씨는 거의 매주 새로운 자녀로부터 연락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탈리아에서 연락이 왔고, 언어 장벽 때문에 구글 번역기를 써가며 소통했다고 전했는데요. 카위트 씨는 서로 다른 언어를 번역기로 주고 받으며 이 상황을 ‘바벨탑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홍태경 PD: 너무나 현대적인, 하지만 동시에 어쩐지 혼란스러운 장면 같네요. 생명을 나누었다는 기증자의 자부심과, 관리되지 못한 시스템의 그림자가 동시에 드러난 사례인데요. 정자 기증은 비교적 최근의 일 같지만, 그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된 제도죠. 언제, 어떤 배경에서 시작됐나요?

본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난임 부부의 자녀 계획을 돕는 것. 하지만 이 제도가 생명 자체를 매개로 하는 만큼, 초기부터 윤리적 논란도 함께 존재했습니다. 기증자는 누구인가?, 아이에게 그 사실은 언제, 어떻게 알려야 하는가?, 기증은 익명이어야 하는가? 같은 문제들이죠.
홍태경 PD: 이번 불거진 니코 씨의 사례처럼, 이 제도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을 경우 여러 위험이 따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나요?
유화정 PD: 기증자 자녀 네트워크(Donor Kind Foundation)의 대표 티스 반 데르 메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은 같은 도시, 같은 학교, 같은 스포츠 클럽, 같은 관심사 속에서 살아간다. 만남은 필연적이다.’ 다시 말해 같은 생물학적 아버지를 가진 아이들은 종종 비슷한 재능과 관심사를 가지는데, 같은 도시, 같은 스포츠 클럽, 같은 학교를 공유하며 자랄 수 있어 위험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인구가 약 1800만 명인 네덜란드와 같은 소규모 국가에서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근친혼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건 굉장히 현실적인 보건 위험이 됩니다. 한편 네덜란드 정부는 이후 조사에서 니코 카위트 외에도 정자 기증으로 40명 이상, 심지어 100명 넘는 자녀를 둔 기증자들을 다수 확인했는데요. 기증이 단일 병원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럽 전역을 넘나들며 유통됐기 때문입니다.

GPS Source: Moment RF / Issarawat Tattong/Getty Images
유화정 PD: 네, 호주는 비교적 엄격하고 체계적인 제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다만 주마다 규정이 조금씩 다른데요. 빅토리아주와 남호주(SA)는 한 기증자가 최대 10가정까지만 기증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고, 뉴사우스웨일스(NSW)나 서호주(WA)는 5가정 이하로 제한합니다. 퀸즐랜드는 법적 제한은 없지만, 병원들이 자율적으로 10가정 기준을 두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빅토리아주는 2017년부터 ‘기증자 추적권(donor tracing)’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 제도에 따라 기증자 정보가 보관되고, 자녀가 성인이 되면 생물학적 부모의 정보를 요청할 수 있게 됩니다. 아이의 '알 권리'를 보장하자는 취지죠. 하지만 이런 제도가 있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닙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기증자의 유전 질환 이력 누락, 동일 기증자의 정자가 과도하게 사용된 사례, 심지어 일부 병원에서의 불법적 유통 의혹 등 관리 허점이 드러난 적도 있습니다. 기증자의 신상이 원치 않게 노출되는 문제, 그리고 정자 기증자 자체가 부족한 상황도 호주 내에서 여전히 논의되고 있는 사안입니다.
홍태경 PD: 정체성 혼란도 심각한 문제가 되죠. 부모가 오랫동안 아이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을 경우, 아이들은 자신의 뿌리를 모른 채 성장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빅토리아주의 경우엔 그나마 기증자 추적권을 통해,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생물학적 아버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네요. 어떤가요, 한국에서는 이와 관련한 제도나 논의는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있나요?
유화정 PD: 한국에서는 법적으로는 정자 기증이 가능하지만, 정확한 자녀 수 제한이나 기증자의 정보 공개 여부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증은 익명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기증자에 대한 등록이나 추적 시스템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아이의 ‘알 권리’나 생물학적 뿌리에 대한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주로 서울 및 수도권 일부 불임 클리닉에서만 기증이 이뤄지고 있고, 이 또한 상당히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자 기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단계입니다.
홍태경 PD: 오늘 이야기를 나누며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역시 ‘가족’이라는 개념인 것 같아요. 정자 기증으로 탄생한 아이와 생물학적 아버지, 그리고 그 아이를 키운 부모 사이에서 가족이라는 의미는 어떻게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걸까요?
유화정 PD: 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혈연 중심의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정자 기증뿐 아니라 입양, 동성 커플, 공동 양육, 심지어 친구끼리의 공동 육아까지…가족의 형태가 훨씬 다양해졌고, 그만큼 정체성과 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다양해지고 있죠.
하지만 이런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이는 법과 제도, 사회의 인식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특히 기증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를 제대로 말해줄 언어와 시스템이 필요한데, 지금은 그것이 부족한 상태인 거죠. 결국 '가족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부모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는데요. 정자 하나로 생명이 시작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으로 가족이 완성되는 건 아니니까요.
또 니코 카위트 씨 사례처럼 정자 기증으로 탄생한 생명 하나하나가 숫자가 아닌, 고유한 존재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그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엄중한 질문을 가져봅니다.
홍태경 PD: 정자 기증. 처음엔 생명을 돕는 숭고한 선택이었지만, 그 선택을 둘러싼 제도와 문화가 함께 따라가지 못할 때, 생명은 숫자가 되고 관계는 모호해집니다. 기증은 익명일 수 있어도 생명은 결코 익명이 아니라는 것. 또 다른 시선으로 마주하게됩니다. 유화정 프로듀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호주 공영방송 SBS(Special Broadcasting Service) 한국어 프로그램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세요. 구글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에서 SBS Audio 앱을 다운로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