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오디오 책갈피. 한국어와 영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오디오 책갈피, 책 속 한 문장, 삶의 한 페이지.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 작은 책갈피 하나 꽂아 드려요. 안녕하세요. SBS 오디오 책갈피 유화정입니다.
식탁 위에 놓인 과일이 시간이 지나 조금씩 물러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신 적이 있나요? 겉은 상처를 입고 빛을 잃어 가지만, 그 주변을 감도는 달콤하고 진한 향기는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되기도 합니다.
오늘 오디오 책갈피에서 오늘 소개해 드릴 책은 한국 문학에서 독창적인 장르적 상상력과 주변부 인물에 대한 깊은 시선으로 주목받아 온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파과>입니다.
제목은 ‘부서진 과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예순다섯, 삶의 황혼기에 접어든 한 여성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삶과 존엄, 그리고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탐색합니다.
조각은 40년 넘게 ‘방역’이라 불리는 살인 청부업을 해온 베테랑 킬러였습니다. 그녀에게 살인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미건조한 업무일 뿐이었고, 자신을 사람이 아닌, 고장 나지 말아야 할 ‘도구’로 여기며 평생 타인과 거리를 두어왔습니다.
그러나 몸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예리함은 무뎌지고, 냉장고 속에서 썩어가는 과일처럼 자신의 삶도 저물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 그녀의 견고한 성벽에 균열이 생긴 것은 한 치과의사 가족과의 우연한 인연, 그리고 길가에서 만난 유기견 ‘무용’을 거두면서부터였습니다. 평생 누군가를 제거하는 법만 익혀 온 조각이, 이제는 누군가를 살피고 돌보는 삶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되는 순간입니다.
"상자 아래쪽에는 제 무게에 눌려 멍이 들거나 물러 터진 것들이 섞여 있게 마련이며, 조각은 그것을 도려내지 않고 가만히 씹어 삼킨다."
짓물러 터진 자리가 가장 달콤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시장에 놓인 무른 과일을 고르는 조각의 손길은 단순한 쇼핑이 아닙니다. 나 또한 저 복숭아처럼 짓물러 가고 있지만, 그 속은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뜨겁다는 자기 고백과도 같습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고 비천한 생명 하나를 건사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공력이, 한 사람의 숨통을 끊어놓는 일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지칠 줄 모르는 인내를 요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처음으로 배운다."
무용이의 온기를 느끼며 손을 움직이는 조각의 시간은 녹아내립니다.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은 킬러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지만, 인간에게는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소설의 후반부, 조각은 자신을 증오하는 젊은 킬러 ‘투우’와 맞서면서 과거의 무표정했던 자신과 작별합니다. 그녀의 손에 든 칼날은 서서히 무뎌지고, 녹슬어 갑니다.
이 순간, 조각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무뎌진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삶의 감각과 온기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완성을 맞이합니다.
"사라진다. 평생을 공들여 다듬어 온 칼날이 무참하게 녹슬어 간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구병모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각이라는 인물을 통해, 노년이라는 시간에도 인간은 여전히 변화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나이 듦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삶의 깊이를 체험하는 또 다른 시작이죠."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라는 독특한 설정과 노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흡입력 있는 서사로, 국내 독자뿐 아니라 전 세계 13개국으로 번역·수출되며 호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뉴욕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 100선’ 선정, 동명의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 초청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흠집 난 과일이 가장 달콤하듯, 조각의 손끝과 마음속에도 삶의 진한 향기가 배어 있습니다. 상실과 고독 속에서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온기와 변화, 그리고 삶의 의미를 이 작품은 우리에게 차분히 전합니다.
오늘 오디오 책갈피에서는 구병모의 <파과>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삶의 가장 낮은 순간에도 여전히 감각과 온기가 깃들어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살아가는 증거임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 마음 한켠에 작은 책갈피 하나 남겨드렸기를 바라며, 지금까지 유화정이었습니다.
상단의 오디오를 재생하시면 오디오 책갈피 팟캐스트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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