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번 피츠로이에 있는 로즈 스트리트 아티스트 마켓. 120여 개의 스톨에서 다채로운 핸드메이드 작품들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네요. 장신구, 그림, 조각… 눈이 풍요로운 곳입니다. 올해로 15년이 된 이 아티스트 마켓은 런던, 베를린, 뉴욕에 있는 비슷한 마켓에서 영향을 받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뭔가 낯익은 작품이 보이네요. 한글 서예가 쓰인 작품들입니다. 붓으로 쓰는 한글의 아름다움을 전파하며 세계의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는 한글 서예가 가은 최 루시아 님을 만나 봤습니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께 인사 부탁드립니다.
루시아: 안녕하세요. 한글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는 가은 최루시아입니다. 전통 서예를 바탕으로 캘리그라피스트로 활동하며 7년 전부터 즉흥 춤을 공부하면서 서예 퍼포먼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좋은데이 첫 번째 버전의 글씨와 영화 스캔들, MBC 드라마 화려한 유혹에서 맡은 손 대역이 있습니다.
강혜리 리포터(이하 리포터): 한글 서예가라는 건 어떤 직업인가요? 전공을 해야 하는 건가요?
루시아: 전 전공을 한 것은 아니고요. 저희 아버지께서 공부 잘하는 어린이보다는 글씨 잘 쓰는 어린이로 저를 키우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서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펜 글씨부를 지나 대학교에서도 전공보단 서예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죠. 그런데 전시 등 활동을 하며 전통 서예가 현대인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서예가 생활의 느낌들을 담는 방법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그를 위해 홍대 프리마켓에 7-8년간 매주 주말마다 참여했어요. 그게 계기가 되어 서예가라는 길로 들어온 거 같아요.
리포터: 7-8년이나 매주 주말 참여라니, 열정과 끈기가 대단하신데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서예가의 길로 연결된 거죠?
루시아: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저와 만난 분들의 성함을 제 명함에 서예로 써서 드려요. 그렇게 뿌린 명함이 많을 때는 1년에 1만 5000장이 되는데요. 그걸 8년간 매주하다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제 명함을 갖고 있게 된 거죠. 아무래도 자기의 이름이 쓰여 있으니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인연이 이어져 칼리그라피가 필요했던 마케팅 업계에 소개를 받게 됐어요. 그때부터 좋은데이 소주를 비롯해서 상품, 아파트 광고 등에 글씨를 써 드리게 됐죠.
호주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흑백의 서예 작품과 한글. 반응이 어떤지 궁금한데요. (현지인 인터뷰)
리포터: 8월 17일이죠. 퀸스랜드 주 한인의 날에 오프닝 퍼포먼스를 맡으셨다고 하셨는데, 어떤 퍼포먼스인가요?
리포터: 한국에서 오신 문화예술 온터, 경기도립 무용단, 그리고 브리즈번의 한마당 여러분들께서 대취타를 연주하시는 가운데 10m의 대형 종이에 기념 문구를 쓸 예정이에요.
리포터: 어떤 문구인가요?
루시아: 궁금하신 분들께선 직접 오셔서 확인해 주세요. 아침 열 시입니다.
리포터: 브리즈번에서 듣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오프닝 행사에 참석하셔야겠는데요. 작년에는 6개국 정도를 방문하셨죠?
루시아: 네, 일본 대만 홍콩 인도네시아 호주 베트남 이렇게 여섯 개 나라를 방문해서 강의, 한글 서예 워크숍, 아트 페어 참여 등을 했습니다.
리포터: 해외 활동이 잦으신 편인데요. 이런 해외 활동을 통해 많은 수익을 얻으시는지 궁금합니다.
루시아: 저는 수익을 위해 해외 활동을 하고 있진 않고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정말로 친구를 만나러 방문해요.
리포터: 아, 그게 정말이었나요. 원래 여행을 좋아하시는가 봐요. 요즘 한 달 살기처럼 노마딕 라이프 스타일이 젊은 층에 많이 유행인데요.
루시아: 굳이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한다기보다는 저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 다른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요. 여행도 관광지를 가기보다는 친구의 집 근처를 돌아보고요. 그 나라 사람들이 진짜 어떻게 사는지 살펴보고 싶은 거죠. 그게 저에게는 중요한 자아 확장의 기회가 되는 것 같아요.
한 번은 친구들이 사는 대만의 여러 도시를 배낭여행처럼 다니며 연달아 워크숍 등을 열었죠. 저는 이걸 루시아 페스티벌이라고 이름 붙였어요. 많은 돈을 번 건 아니지만, 많은 친구들과 현지인들이 참석해 주셨고요. 친구들이 제가 하는 행사를 도와주기도 하는데 그런 경험을 통해 그 친구들도 관심 분야를 더 가깝게 찾아가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그 친구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같이 찾죠. 물론 친구들이 한국에 오게 되면 제가 챙겨주고요.
리포터: 프리 마켓에서 만난 친구들이니까 아무래도 예술에 관심이 많을 수 있겠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활동하시는 분을 가까이서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더 또렷이 보일 수 있을 것 같고요. 사실 예술과 여행은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만 꿈만 꾸는 분야인데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죠. 특히 한국에서는 특히 어느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의 집과 차가 있어야 하고 자녀는 어느 대학, 부모님 용돈이나 친구 부조금은 어느 정도 등등 사람 구실이라고 하는 압박이 있어요. 선생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다 하고 계세요.
루시아: 세상은 돈의 원리로 살 수밖에 없지만 저는 아티스트로 활동하면서 어떻게 하면 꿈의 원리로 세상을 살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렇게 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움직인 것이 아니었는데 제 마음이 가는 대로 꾸준히 하다 보니 지금과 같이 전공과는 관련 없는 서예라는 일을 하며 친구들을 만나며 여행을 지속하고 있고요. 세상을 향한 밝은 미소를 갖고 웃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많은 것들이 변화되고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포터: 정말 긍정적이시네요. 항상 자신을 들여다보는 통찰력과 없는 길도 만들어 나가는 모험 정신이 느껴지는데요. 그래도 미래가 불안하실 때는 없는지요?
루시아: 제 인생 전체를 보면 힘든 시기는 많이 있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서예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만으로 생계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걸 알고 굉장히 좌절했고요. 할 수 없이 친구의 일을 도우며 돈을 벌었고 너무나도 불행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 얻은 깨달음은 뭐냐면, 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방구석에서 좌절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안되죠. 저는 저와 제 가족을 위해 생계를 해결해야 했지만, 서예를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포기할 필요도 없었죠. 굶더라도 글씨를 쓰는 게 행복하다는 걸 그때 절실히 알게 됐으니까요. 지금도 통장 잔고를 보면 마음이 휑해질 때가 있지만, 그게 저를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아요. 서예를 하고,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얻는 기쁨과 재미로 제 삶이 나아가고 있으니까요.
리포터: 사실 소수의 아티스트를 빼고는 대부분이 파트타임으로 다른 일을 병행하죠. 여기 계신 마켓의 아티스트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모두 참 즐거워 보여요. 선생님처럼요.
루시아: 네, 제가 70대가 되고 80대가 된다 해도 저는 자신이 빛나고 행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요. 죽을 때까지도 신나게 죽는 방법에 대해서 상상하곤 해요.
리포터: 그렇다면 선생님은 지금 행복하신지요?
루시아: 저는 물론 생활인으로서는 많이 부족한 편이에요. 하지만 그런 제 자신을 저는 잘 받아들이고 있고 이런 나를 질책하기보다는 제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치열하게 찾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신기하게도 많은 것들이 나의 마음이 가는 대로 해결되고 있어요. 처음 방문한 하노이에서도 영사관을 통해 준비한 워크숍에 150분이나 모여 주셨고요. 저는 지금을 충분히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불안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지 않고요.
리포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어떻게 루시아가 루시아로서 살며 자연스럽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생각하며 살고 싶습니다. 지금은 제 체력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많은 친구들과 맥주 한 잔 기울이며 도란도란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하는 삶을 꿈꾸고 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베를린과 뉴욕에 가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전하며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습니다.
리포터: 오늘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멜번을 만끽하고 돌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라고요. 애청자 여러분은 물처럼 지나가 버리는 지금을 잡고 계시나요? 아니면 과거의 후회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지금의 행복을 놓치고 계시진 않은지요? 오늘은 지금이라는 파도를 치열하게 붙잡고 계신 한글 서예가 가은 최 루시아 님과 진짜 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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