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할 때, 여러분은 가장 먼저 무엇을 챙기시나요? 아마 지갑이나 휴대폰만큼이나 호주에서는 '선글라스’를 떠올리실 겁니다.
지난주 컬처인에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된 ‘콜(Kohl)’, 즉 아이라인이 단순한 화장이 아니라 강한 태양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이야기, 전해드렸는데요.
수천 년 전에도 인간은 ‘빛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햇빛 아래 살아가는 호주인들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을까요? 오늘 컬처인에서는 ‘안경의 환생’, 호주에서 시작된 지속 가능한 패션 이야기를 짚어봅니다. 유화정 프로듀서 함께 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전 세계에서 선글라스를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사용하는 나라, 아마 호주가 아닐까요?
네 세계적으로 자외선 지수가 매우 높은 호주에서 강렬한 햇살로부터 눈을 보호하는 것은 일상의 중요한 문화입니다. 통계적으로도 인구 대비 사용량이 매우 높고요.
호주인들에게 선글라스는 ‘멋을 위한 아이템’이 아니라 눈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 장비죠.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오늘 저희가 컬처인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이 쓰느냐'가 아니라, '그 수많은 안경이 수명을 다한 뒤 어디로 가느냐'에 대한 질문이 되겠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호주는 지리적 특성상 강한 자외선으로 인해 선글라스 수요가 높고, 환경 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 관련 혁신이 빠르게 일어났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어차피 매일 쓰는 제품이라면, 더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없을까? 이 질문이 혁신의 출발점이 된 것이죠.
박피디님, 혹시 지금 쓰고 계신 안경…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냥 이름 대면 누구나 알듯한 호주의 일상적인 안경 브랜드 매장에서 산 건데, 아마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냈겠죠?
보통은 그렇죠. 그냥 매장에서 산 제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쩌면 그 안경의 시작은 플라스틱 생수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네 우리가 마시고 버리는 600ml 플라스틱 생수병 1개를 통째로 재활용해 안경테 하나를 만듭니다.
생수병 1개로 안경테 하나를 만든다니, 무척 흥미로운데요. 어떻게 가능한 지 자세히 들어보죠.
시드니에 본사를 둔 Good Citizens이라는 브랜드가 그 주인공인데요. 호주의 친환경 소재 안경의 선구적인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굿 시티즌은 버려진 플라스틱 병을 분쇄하고, 다시 녹여 안경 프레임으로 재성형하는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했습니다.
설립자 닉 로빈슨은 "플라스틱 병으로 안경을 만들자"는 아들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없는 도전과 실패를 견딘 끝에 드디어 내구성과 디자인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생수병으로 안경테를 만들자는 것이 그러면 아이들의 생각이었나 보네요.
네 이야기는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드니에 사는 해리와 아치, 두 형제가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아빠 닉에게 “아빠, 지구가 플라스틱 쓰레기로 망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고칠 방법이 없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빠 닉은 아이들에게 말로만 “알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600ml 생수병 하나를 가져와 무게를 쟀고, 그게 선글라스 하나 무게와 같다는 걸 확인한 순간 인생을 건 도전이 시작됐습니다.
그럼 닉 씨는 원래 안경 광학 쪽의 일을 하고 있었나요?
닉은 시드니의 대형 광고 대행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며 브랜드 전략을 짜던 '광고 및 마케팅 전문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안경 공정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왜 안경테는 꼭 이런 소재로만 만들어야 하지?", "왜 나사가 꼭 들어가야 하지?" 같은 기존 업계의 상식을 깨는 질문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나사 없는 안경’이라는 파격적인 상상은 비전공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기존의 틀을 깰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아웃사이드(Outside-in)’ 혁신이네요.
호주 전역의 안경 제조 공장을 찾아다녔는데, 돌아온 답은 모두 하나였습니다. “100% 재활용 플라스틱으로는 안경테 못 만듭니다.” "재활용 플라스틱 100%로는 안경테의 탄성이나 강도를 절대 맞출 수 없다"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네. 실제로도 재활용 플라스틱은 성질이 까다로워서 기존 방식으로 만들면 계속 부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결국 전문가들의 조언을 뒤로하고 독학으로 소재 공학을 파고들었습니다. 공장 한쪽에서 직접 플라스틱을 녹이고 금형도 깎아가면서 실험을 반복했습니다. 아이들과 한 약속이 있었거든요. “새 플라스틱은 단 1%도 쓰지 않겠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년간, 수천 번의 실패를 거쳤습니다. 752일 동안 닉은 실험을 멈추지 않았고 무려 2, 503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나사 하나 없이 5가지 부품이 레고처럼 조립되는 '모듈형 안경테’가 탄생하게 됩니다.
실패를 쌓아서 만든 값진 결과물이네요. 나사가 없는 조립 제품이라니, 나사가 빠져 달아날 일도, 고장 날 일도 적겠는데요?
맞아요. 일반적인 재활용 안경과 달리 단 하나의 나사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의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100% 단일 소재(Mono-material) 조립 방식으로 나사가 빠져서 안경을 못 쓰게 될 걱정이 없고요. 금속 부품 없이 레고처럼 조립되는 모듈형 디자인이라 수리가 매우 간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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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요. 금속 부품 없이 레고처럼 조립되는 디자인이라 수리가 또 매우 간편합니다. 또 혹시 스타일을 바꾸고 싶다 하면 이 시티즈니스 매장에서 부품만 따로 구매해서 원하는 스타일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네, 그렇게
혹시 스타일을 바꾸고 싶다면 Good Citizens 매장에서 부품만 따로 구매해 원하는 스타일로 쉽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100% 재활용 안경테, '단 1%의 새 플라스틱도 섞지 않겠다'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이뤄낸 아빠의 정말 값진 성공이네요.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 이 두 아들이 회사의 공동 설립자로서 각각 25%씩의 지분을 갖고 경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2018년 당시 8살과 6살이었던 해리와 아치 두 형제는, 2026년 현재 16살과 14살이 되었는데요.
첫째 해리는 이제 어엿한 청소년이 되어 TEDx Sydney 같은 큰 무대에서 강연하는 '환경 운동가'이자 '비즈니스 리더'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쓰레기를 만드는 세대가 아니라, 세상을 고치는 세대"라고 외칩니다. 단순히 아빠를 돕는 수준을 넘어 브랜드의 비전을 전파하는 핵심 인물입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안경 디자인에 대한 피드백도 훨씬 구체적이고 날카로워졌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질문에서 시작된 프로젝트가 지금은 가족이 운영하는 브랜드로 성장했다는 것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호주다운 유연함도 느껴지고요. 한편 굿 시티즌스의 성공 이후 호주 안경 산업에도 여러 변화가 일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런 굿 시티즌스의 행보는 호주 안경 산업 전체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일전에 한국의 지폐 폐기물로 채운 돈방석과 만년필 등에 대해서 컬처인을 통해 소개를 드린 적이 있는데요. 호주에서는 지폐 폐기물로 안경테를 제작하는 '드레스덴 비전'이 있습니다. Dresden Vision 은 재활용 플라스틱 기반 소재를 활용해 다양한 실험을 이어왔는데, 폴리머 지폐 같은 소재까지 활용 가능성이 제시되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폐지폐를 활용해 안경테를 만든다… 이것도 정말 놀랍네요. 그러면 “내 눈 위에 달러가 올라간다” 이런 표현이 가능해진 거네요!
이제는 재활용을 넘어 순환 구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아예 헌 안경을 수거해 소재별로 분해한 뒤 새로운 안경으로 찍어내는 '스펙사이클 Spexcycle' 같은 프로그램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아프리카 등에 보내는 기부를 넘어, 소재를 완전히 순환시키는 시스템으로, 즉 ‘버리는 순간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사실 예전부터 안경을 버리지 않고 나누는 방식도 있었죠?
대표적인 것이 국제 라이온스 클럽의 ‘Lions Recycle for Sight’ 프로그램인데요. 1990년대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수백만 개의 안경이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시력 교정이 어려운 지역으로 전달됐습니다.
호주에서는 안경점이나 병원 등에 설치된 수거함을 통해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죠. 청취자 여러분께서도 주변에서 한번쯤 보셨을 겁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논쟁도 있습니다. 먼저 기부의 한계인데요. 기부된 안경이 실제 사용자와 도수가 정확히 맞니 않는 경우가 많고, 세척과 분류,ㅡ 운송 과정에서 비요잉 적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는 건데요.
반면 재활용 방식은 안경을 그대로 보내는 대신 소재로 다시 가공해 각 개인의 시력에 맞는 새 안경을 새 안경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단순히 기부와 재활용을 비교하기보다,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기부가 장기적인 해결에는 재활용이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할 것 같네요.
오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제 안경이 다시 보입니다. 이제 안경은 단순한 시력 보조 도구를 넘어 우리가 지구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문화로 세상을 읽는 컬처인, 오늘은 안경의 환생, 그 순환의 이야기를 함께했습니다. 유화정 프로듀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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