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군의 반대 진영이었던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제국을 포함한 동맹국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군과 함께 참전했습니다.
42만 명의 병사 가운데 최소 천 명의 호주 원주민과 토레스해협 군도민이 자원 입대했으며 문화적으로 다양한 배경의 다른 많은 병사들도 포함돼 있습니다.
에드먼드 츄 교수는 멜번 소재의 중국역사박물관의 자원봉사 연구원입니다.
에드먼드 교수는 유럽혈통이 아닌 이들의 입대를 면제하는 국방법 (1903 Defence Act)이 있었고, 당시에는 군입대를 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유럽혈통이어야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중국계 호주인들은 이같은 국방법에도 불구하고 입대한 경우였다고 말했습니다.
중국계 호주인 안작군에 대한 지금까지의 그의 연구에 따르면 217명이 제1차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는 애국적 청년들이 국가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은 의료 관계자의 수락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일부 국민에게 민족성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주민 및 토레스해협 군도민 재향군인서비스협회의 전국 의장이자 호주 원주민 전통부족 군둔구라 출신인 게리 오클리 씨는 많은 호주 원주민들이 자원입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습니다.
호주원주민들은 군입대 금지 조치를 피하는 다른 방법을 찾았습니다.
오클리 의장은 한 곳에서 군입대가 거부된 이들은 다른 주로 갔는데, 군에 자원입대하고자 했던 이들은 다른 주에서는 병역판정을 하는 의료 담당자들이 꽤나 느슨하기 때문에 더 쉽다는 말을 듣고 다른 주로 건너가 입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게리 오클리 의장은 원주민 및 토레스해협 군도민 출신의 남성들이 군에 입대한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는데, 여기엔 처음으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포함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호주 원주민들이 동등하게 처우된 최초의 순간이었다고 믿습니다.
호주국립대학의 연구원인 엘레나 고버 박사는 수천 명의 러시아 출생 군인들은 유럽혈통에도 불구하고 호주인으로 받아들여지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러시아 안작군은 영국, 뉴질랜드 및 캐나다 출신 군인 다음으로 호주정예군(the Australian Imperial Force)에 가장 많이 입대했습니다.
러시아 군인들은 제정러시아의 다양한 민족 배경 출신들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사망자와 부상자 측면에서 호주에 가장 큰 피해를 낳은 전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최소 6만 명이 사망했고 이 외에도 15만 6천 명의 군인이 부상을 당하고 전쟁포로로 끌려갔거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많은 생존자들은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불행히도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호주원주민 귀향군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길 원한 바람은 인종에 기반한 군입대 자격 제한이 없어진1949년 전까지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클리 의장은 호주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온 많은 장병들이 호주를 위해 전장에서 싸우고 돌아왔을 때 원주민 보호구역이 호주 정보가 귀향 군인을 위해 시행한 군인 정착민 제도로 바뀌면서 갈 곳을 잃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참전하기 전 살았던 곳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됐는데, 국가를 위해 싸우고 돌아오자 살던 곳의 구획이 정해져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라며 여전히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엘레나 박사는 일부 러시아 출신 안작군은 전후의 생활을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합니다.
엘레나 박사는 많은 경우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이었고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며 많은 이들이 자살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들이 겪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어느 누구도 진정으로 이해하지도 원인을 밝히지도 못했다며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어야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러시아 출신 안작군은 현지인 여성과 결혼해 삶을 꾸려나가며 점차 호주인으로 정착해 갔습니다.
엘레나 박사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 배경을 지닌 안작군의 역사에서 호주의 다문화주의가 시작됐다고 말했습니다.
오클리 의장은 호주원주민에게 4월 25일 안작데이 행진은 인정에 대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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