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Diary of a Murderer)>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시선을 통해 인간 본성과 기억의 불완전성을 탐구한 작품입니다. 2013년 발표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키며 영화와 만화로도 제작되었고, 2019년에는 영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로 번역 출간돼 국제적인 독자층을 확보했습니다.
김영하 작가는 이미 해외 문학계에도 잘 알려진 이름입니다. <빛의 제국>,<검은 꽃>,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등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날카로운 상상력과 실험적 서사로 주목받아왔습니다. 특히 <살인자의 기억법>은 2020년 독일 추리문학상 국제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오디오 책갈피.
책 속 한 문장, 삶의 한 페이지.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 작은 책갈피 하나 꽂아드려요.
안녕하세요, SBS 오디오 책갈피 유화정입니다.
오디오 책갈피 오늘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김영하의 화제작을 만나봅니다. 제목만으로도 강렬한 울림을 주는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입니다.
한 프로그램을 통해 이 소설의 탄생 비화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처음 구상 단계에서 “70대 노인을 주인공으로 쓰겠다” 하니, 출판사에서는 “젊은 독자들이 싫어할 거다” 하며 40대로 낮춰달라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주인공이 알츠하이머에 걸린다는 설정에 “그런 어두운 이야기는 안 팔린다”며 난색을 표했다는데요. 하지만 그 소설은 세상에 나왔고. 국제적인 수상을 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김영하 작가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1인칭 시점 소설입니다.
주인공은 일흔 살의 수의사, 김병수.
그는 평벙하지 않은 인생을 걸어왔습니다. 열여섯 살, 가정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를 베개로 눌러 죽인 뒤, 마흔 중반까지 은밀하게 연쇄살인을 이어왔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이나 금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더 완벽한 쾌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강박이 그를 몰아갔습니다.
마지막 살인은 2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뇌 수술을 받은 뒤부터는 살인의 충동이 멈췄습니다. 그 후론 입양한 딸 은희와 함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죠.
그런 그가 치매 진단을 받습니다. 잃어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녹음기를 차고 다니며 기록하지만, 정작 그 메모조차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현재는 희미해지고, 과거만 또렷해지는 그의 삶.
딸 은희를 노리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 동시에 전직 연쇄살인범인 아버지. 그는 과연, 사랑하는 딸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무서운 건 ‘악’ 이 아니라, ‘아무도 그걸 이길 수 없는 시간’이라는 그의 독백은 잔혹한 살인의 기억보다 더 큰 공포를 안겨줍니다.
시를 쓰고 독서를 하는 살인마의 독서적 표현은 문학적 감성마저 담고 있습니다. 수치심을 느낄망정 죄책감은 느끼지 않는다는 병수는 기억을 잃어가지만 과거는 점점 선명해지며, 자신의 살인의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Diary of a Merderer by Young-ha Kim
소설을 읽는 내내 우리는 병수의 시선을 따라가지만 결말에 다다를수록, 이 모든 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환영인지 그 진위를 알 수 없게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을 접하는 순간, 지금까지 읽고 있던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돼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소설의 조각들을 맞춰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한 평론가는 이 소설은 반드시 두 번 이상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제목과는 달리 잔혹한 묘사 대신, 시간의 무상함과 기억의 불안정성에 집중하는 듯합니다. 특히 전직 연쇄살인범인 일흔 살 치매 환자가 딸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인간적인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를 속이며, 우리가 믿는 진실이 과연 믿을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결국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기억이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
이 작품은 치매에 갇힌 살인마의 기록을 넘어, 망각과 회상이 교차하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오디오 책갈피는 연쇄 살인의 서사 너머, 인간의 본성과 그 누구도피할 수 없는 시간과 기억의 상실을 다룬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함께 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마음 한켠, 작은 책갈피 하나 남겨드렸길 바라며
지금까지 유화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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