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Points
- 서정의 풍경을 넘어, 이효석이 바라본 푸른 하늘의 이면
- 끝없이 펼쳐졌으나 닿을 수 없던, 1930년대 청춘의 희망과 허상
- 1939년 경성 하얼빈교향악단 공연을 모티브로 한 천일마의 만주행
SBS 오디오 책갈피. 한국어와 영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오디오 책갈피,책 속 한 문장, 삶의 한 페이지.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 작은 책갈피 하나 꽂아드려요.
안녕하세요, SBS 오디오 책갈피 유화정입니다.
소금을 뿌린 듯한 봉평의 하얀 메밀 꽃밭..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단편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
우리는 흔히 그를 서정적인 이미지로 기억하지만, 그의 문학 세계는 그보다 훨씬 넓고 다양합니다.
오늘 소개할 장편 <벽공무한> 역시 그런 이효석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1940년 1월부터 7월까지 ‘창공’이라는 이름으로 매일신보에 연재됐고, 이듬해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나오면서 지금의 제목을 갖게 됐습니다. 2018년에는 영문 번역본 Endless Blue Sky가 영국에서 출간되기도 했습니다.
“벽공무한(碧空無限)”이라는 책 제목은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을 뜻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단순한 낭만이 아니라 그 시대 청년들이 멀리서 바라보던, 손 닿지 않는 희망을 상징하는 표현에 가깝습니다. 1930년대 말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청년들은 꿈을 펼칠 기회도, 내일을 확신할 미래도 쉽게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하늘은 아무리 넓게 열려 있는 듯 보여도, 실제로는 닿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죠.
<벽공무한>에는 실제 당시 경성에서 열렸던 하얼빈교향악단 공연의 흔적도 담겨 있습니다. 1939년 3월, 경성일보가 초청한 이 교향악단은 현재 서울시의회 건물인 옛 부민관에서 성대한 연주회를 열었는데요.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 교향곡 5번 〈운명〉 등이 연주되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무대만을 바라보며,
물을 뿌린 듯 고요한 장내에
베토벤 '운명'의 선율이
우렁차면서도 고요하게 흘러왔다.
음악은 실생활의 감동을 전달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운명'의 암시에 혼이 뽑힌 듯
고요 속에서 깊은 감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운명의 문은 열렸다 닫혔다 하며
사람의 뜻대로 휘어지지 않는다.
그 무서운 의지에 휘둘리며
사람들은 다만 웃고 울 뿐이다.
수천의 청중은 '운명'의 곡조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비춰보듯
웃고 혹은 울기 위해 온 셈이었다.
그 곡조를 따라
웃지 않은 이, 울지 않은 이
과연 누구였으랴. - 본문 중
<벽공무한>은 이 문화적 사건을 모티브 삼아 이야기를 펼쳐갑니다. 실직 상태였던 주인공 ‘천일마’는 하얼빈교향악단을 유치하는 신문사 업무를 맡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만주행 열차에 오릅니다. 하얼빈에 도착한 뒤 ‘천일마’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행운을 잇달아 맞습니다. 우연히 산 복권이 당첨되고, 심심풀이로 참여한 경마에서도 상금을 타고, 그곳에서 만난 러시아계 금발 여성과 사랑까지 이루게 됩니다.

Author at his garden, 1936 / Lee Hyoseok Foundation
그의 친구 ‘유만해’는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이자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있는 인물이지만 한탕주의에 빠져 금광 투자에 몰두하다 결국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소설은 ‘천일마’와 ‘유만해’ 두 인물의 대비를 통해 당시 청년들이 처한 사회 구조적 고립, 막혀 있는 기회, 그리고 신기루 같은 희망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작품이 발표된 지 8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시대 청년들이 느꼈던 막막함은 지금 세대의 고민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비슷한 꿈을 품고, 비슷한 불안을 견디며, 보이지 않는 희망을 붙잡아보려 애쓰는 모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 젊은 세대가 신기루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가”
이효석의 <벽공무한>은 그 구조적 배경을 일찍이 보여준 작품이 아니었을까요..
현실의 삶은 흐린 날도, 때로는 갑작스러운 비바람도 찾아오죠. 그 속에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일,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태도일 겁니다.
오늘 오디오 책갈피에서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삶을 돌아보게 해주는 소설, 한국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효석의 <벽공무한>을 함께 펼쳐봤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 작은 책갈피 하나 남겨드렸길 바라며, 지금까지 유화정이었습니다.
상단의 오디오를 재생하시면 팟캐스트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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