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오디오 책갈피. 한국어와 영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편혜영은 일상의 틈에서 스며 나오는 공포와 심리적 균열을 섬세하게 포착해 온 한국 스릴러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장편 <홀>은 2018년 미국 셜리 잭슨 상(Shirley Jackson Awards) 장편 부문을 수상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았습니다.
추리·스릴러·호러 장르 문학에 주어지는 이 상을 한국인이 받은 것은 편혜영 작가가 처음으로, 영어권에서 출간된 <홀(The Hole)>은 한국 문학이 가진 고유한 공포의 결을 세계 독자들에게 각인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오디오 책갈피. 책 속 한 문장, 삶의 한 페이지.
여러분의 마음 한켠에 작은 책갈피 하나 꽂아드려요.
안녕하세요. SBS 오디오 책갈피 유화정입니다.
"인류 최고의 지도인 바빌로니아 세계지도는 중심에 원이 뚫려 있었다. 학자들에 의해 컴퍼스로 지도에 원을 그리다가 생긴 구멍이라는 게 밝혀졌다.
그 좁고 검은 구멍은 이제는 찾을 수 없는 한 시대의 기억처럼 깊었다.
사라진 시대와 만나려면 저 구멍에 닿아야 했지만 결코 닿을 수 없으리라."
오디오 책갈피 오늘은 한국인 최초로 미국 셜리 잭슨 상 장편 부문을 수상하며 해외에서도 주목받은 작품, 편혜영 작가의 장편소설 <홀 (The Hole)>을 함께 펼쳐봅니다
편혜영 작가는 한국 문학에서 일상 속 서늘한 공포를 가장 정밀하게 그려내는 소설가로 꼽힙니다. 일상의 균열, 설명할 수 없는 불안,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지점을 절제된 문장으로 들여다보는 작품 세계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 문학 시장에서도 강한 존재감을 보여왔습니다.
특히 <홀>은2018년 미 셜리 잭슨 상 장편 부문을 수상하며 전 세계 스릴러·호러 독자들에게 한국문학의 새로운 얼굴을 알린 작품입니다.

한국인 최초 미 셜리 잭슨상 수상 The Hole 편혜영 작가
반면 그의 아내는 성장의 곡선을 타지 못한 채, 꿈을 자주 바꾸고, 늘 주저앉는 경험을 반복해온 인물입니다. 현실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며 점점 움츠러들고, 정원 일과 기록에 매달리며 스스로 고립되어 갑니다.
남편 오기의 작은 외도와 무심함은 그녀 마음속 구멍을 점점 넓혀갔습니다. 아내는 강박적으로 남편의 일상을 기록했고, 오기는 그녀의 불안과 의심을 감정 문제로 치부하며 무시했습니다.
말하는 자와 말해도 닿지 않는 자. 두 사람의 균열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계획한 이혼을 앞둔 마지막 여행.
운전 도중 두 사람은 격렬하게 다투고 결국 교통사고가 발생합니다.
아내는 현장에서 사망하고, 오기는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남습니다.
사고 이후 오기 앞에는 단 한 사람, 장모만 남습니다. 딸의 죽음 이후 장모는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사위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오기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사고로 턱이 부러져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죠. 과거 그가 아내의 감정을 마음대로 해석했던 것처럼, 이제는 그가 ‘말할 수 없는 자’가 되었고, 장모가 그의 마음을 대신 말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은 배제되고, 장모의 해석만이 유일한 서사가 된다."
책 속의 한 문장이 말해주는 이 대칭 구조는 이 소설의 가장 날카로운 지점입니다. 소설에는 세 개의 마음의 구멍, 홀(Hole)이 등장합니다.
아내의 홀. 오기의 홀. 장모의 홀.
남편의 무시와 언어적 폭력에 낙천적이던 아내의 마음에 작은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은 남편의 외도 행태를 알게 되면서 더 크게 벌어집니다. 그녀의 정원 가꾸기는 ‘회복’이 아닌 ‘공허를 메우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아내의 마음에 생긴 구멍은 결국 관계를 뒤흔들고 살아있는 오기를 ‘말할 수 없는 죽은 자’로 만듭니다.
딸의 기록에서 본 사위의 실체.. 딸을 잃은 장모의 슬픔은 오기에 대한 뒤늦은 분노로 장모의 구멍은 복수로 변합니다. 그녀는 매일 마당에서 거대한 구덩이를 팝니다. 딸의 옷을 입은 채. 연못을 만든다는 명목 아래. 살아 있는 사위를 옭아매는 이 구덩이는 단순한 흙덩어리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공허와 폭력을 상징합니다.
어쩌면 누구라도 그 안에 빠질 수 있는 작고 조용한 오해들.
소리 없이 커져가는 마음의 공백.
누군가의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해석의 폭력.
어느 평론가는 이 작품을 스티븐 킹의 '미저리 (Misery)' 같은 숨막히는 스릴러이면서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침묵과 해석의 폭력을 탐구한 철학 소설로 남는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읽는 내내 긴장으로 숨을 조이지만, 다 읽고 나면 묘하게 마음 깊은 곳의 어딘가를 건드리고 가는 소설입니다.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음이 무너지고 말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 오늘 오디오 책갈피에서는 편혜영 작가의 <홀>을 통해 말할 수 없고 이해받지 못한 마음의 홀을 마주해봤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한켠 작은 책갈피 하나 남겨드렸길 바라며 지금까지 유화정이었습니다.
상단의 오디오를 재생하시면 팟캐스트를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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