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Points
- 출근복으로 반바지, 어디까지 괜찮을까?
- 호주의 날씨와 라이프스타일이 만들어낸 '반 바지'와 '맨발 문화'
- 반바지 논쟁에서 읽을 수 있는 권위, 자유, 개성과 공동체 감각의 문화적 의미
호주는 지금, 겨울의 마지막 달입니다.
유난히 잦은 비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더 깊게 느껴지는 요즘,
이른 아침 출근길엔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손을 녹여주는 계절이죠.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연일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진 한국과 영국에선 직장인의 ‘사무실 반바지’ 착용이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남성들의 ‘반바지 출근’, 과연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을까요?
오늘 컬처인에서는 이 반바지 논쟁을 통해 복장과 문화의 경계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문화로 세상을 읽는 컬처인, 유화정 프로듀서 함께합니다.
박성일 PD: 저는 매일 아침, 출근 전에 패딩을 입을까 말까 고민하는데, 지구 반대편 세상은 정말 다르네요. 최근 BBC가 흥미로운 사례를 전했죠. 영국에서 한 광고 회사 대표가 반바지를 사무실 복장으로 적극 권장했다고요?
유화정 PD: 네 북잉글랜드에서 직원 9명과 함께 작은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를 운영하는 ‘토니 하디’ 대표인데요. 무더운 날씨에 사무실 에어컨까지 고장 나자, 직원들에게 반바지를 입으라고 권장했습니다. 평소에도 회사 복장 규정은 없었지만, 전문성과 편안함을 모두 고려한 복장을 권장해 왔다고 해요. 공교롭게도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까지 고장 난 상황에서, 땀이 찬 긴 바지를 입고 불편함을 견디는 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겁니다.
박성일 PD: 확실히 더위에 땀 뻘뻘 흘리며 일하면 업무 효율도 떨어지죠.
유화정 PD: 토니 씨는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불편하게 일하는데, 거기서 훌륭한 결과물까지 기대한다고 생각해 보라"고 반문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남성의 출근 복장으로 반바지가 적합한가를 묻는 영국 내 여론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2022년 유고브(YouGov)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66%가 남성이 사무실에서 반바지를 입는 것이 괜찮다고 답했는데요. 이는 2016년의 37%보다 크게 증가한 수치라 더욱 주목됩니다. 다만 이 조사는 영국 역사상 가장 더웠던 날에 진행됐다는 점이 감안됩니다.
박성일 PD: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직장 복장이 상당히 캐주얼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는데요. 예전엔 남성 직장인 하면, 양복 정장에 넥타이, 반짝반짝 광나는 구두, 말끔하게 가른 가르마 머리까지 정형화된 이미지였죠.
유화정 PD: 네 그랬죠. 여성들은 정장 투피스에 하이힐, 스커트 길이는 무릎선에 맞춰야 했고요. 그리고 남녀 모두 검은색, 감청색 일색이었고요. 특히 방송계에서는 여자 아나운서들이 머리를 어깨 아래로 기르지 못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너무도 개성을 존중하는 트렌드로 정말 많이 바뀐 것이죠. 저희가 얼마전 컬처인에서 다룬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71세가 된 바비 인형이 70년간 고수해 온 트레이드 마크인 하이힐을 벗고, 맨발이 됐습니다. 지금 세대의 변화와 가치를 적극 반영한 모습니다.
박성일 PD: 요즘은 남 녀 구분 없이, 직장에서도 청바지에 스니커즈 차림을 흔히 볼 수 있는데요. 여기서 하나 짚어보죠. ‘바지’가 인류의 기본 복장으로 자리 잡은 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고요?
유화정 PD: 사실 인류의 첫 복장은 치마였습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도, 로마의 귀족들도, 심지어 초기 중국인들까지 모두 긴 천을 둘러 입었죠. 그러다 전쟁이 일상이 되면서, 말을 타고 싸우기 편한 복장이 필요해졌고… 그렇게 탄생한 게 바로 ‘바지’입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산악 지대, 그리고 말을 타는 유목 문화와 함께 바지는 ‘전사의 복장’으로 자리를 잡게 되고 이후 시대를 거치며, 남녀 누구나 입는 ‘보편복’이 됐습니다.
박성일 PD: 세계 최대 규모의 사이클 대회 ‘트루드 프랑스’가 바로 지난달 열렸죠. 저희 SBS Australia에서 매년 라이브 중계를 해드리고 있는데요. 자전거가 바지를 일상복으로 만든 결정적 계기라는 얘기도 있던데요?
유화정 PD: 네,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한 연구에 따르면, 바지가 남녀 공통의 일상복이 된 데는 1800년대를 휩쓴 자전거 열풍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여성들은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통이 넓고 긴치마를 입었는데요. 자전거를 타기엔 너무 불편한 차림이죠. 자전거가 큰 인기를 끌면서 여자들도 허벅지 통이 넓은 배기팬츠 (baggy pants) 같은 스타일의 바지를 입기 시작했고, 이것이 평상복으로 정착하게 된 겁니다.
박성일 PD: 호주에 처음 오신 분들 가운데, 시티에서 반바지 입고 활보하는 중년 남성들이 처음엔 굉장히 낯설었다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한국에선 보기 드문 풍경이죠.
유화정 PD: 게다가 맨발이라면 더욱 놀랍죠? 사실 이 반바지 문화는 영국인들이 만든 겁니다. 19세기 후반 아프리카 가나에 주둔했던 영국군 소속의 병사들이 더운 날씨를 참지 못하고 바지를 줄여 입기 시작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박성일 PD: 영국인들이 대체적으로 더위를 잘 못 참나 보네요. 그렇다면 호주인들이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로 쇼핑센터나 은행을 가고, 또 일명 thongs이라고 불리는 일명 쪼리 슬리퍼를 신고 시내 거리를 활보하는 건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유화정 PD: 호주에서 반바지에 맨발 문화가 생긴 것은 우선 호주의 기후를 첫째로 꼽을 수 있습니다. 호주는 연중 대부분이 온화하거나 덥고 건조한 날씨인 데다, 특히 동부 해안과 퀸즐랜드 지역은 해변 문화가 생활 깊숙이 뿌리내려 있죠.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맨발로 놀고 바닷가를 오가는 문화가 배여 있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맨발에 대한 거부감이 낮은 편입니다.

Credit: sbs.jpg
박성일 PD: 결국 반바지와 맨발은 호주의 해양 기후, 격식 없는 실용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생활습관이 만들어낸 호주식 라이프스타일인 셈이군요.
유화정 PD: 유명 코미디언이나 TV 인물들이 공식석상에서 반바지나 쪼리 슬리퍼를 신고 등장하는 모습, 종종 보셨을 텐데요. 이는 일종의 “호주스러움(Aussie-ness)”을 강조하는 의도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다소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호주에서는 맨발로 다닌다고 해서 사회적 비판을 받는 일은 드뭅니다. 물론 격식을 갖춰야 하는 클래식 콘서트 장이나 고급 레스토랑, 사무실 같은 포멀 한 공간에서는 여전히 신발 착용이 기본 예의로 여겨지죠.
박성일 PD: 한국에서는 올여름 폭염 속에 공무원들의 반바지 논란이 뜨거웠는데요. 놀랍게도 서울시에서는 이미 2012년에 직장 내 반바지 착용을 허용했다면서요?
유화정 PD: 그렇습니다. 서울시에 이어 경기도에서도 여름철 공무원 복장 간소화 방안을 시행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사실 한국 행정안전부는 2011년부터 ‘하절기 공무원 복장 간소화’를 지속적으로 권고해오고 있습니다. 공무원이 여름철에 입을 수 있는 ‘간소하고 단정한 복장’으로, 상의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노타이 차림 정장이나 콤비, 니트, 남방, 칼라 셔츠 등이, 하의는 정장바지, 면바지 등이 구체적으로 예시로 제시돼 있고요. 다만, 노출이 심한 옷이나 찢어진 청바지, 슬리퍼처럼 공무원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복장은 피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박승원 광명시장(왼쪽에서 세번째)과 직원들이 시청 앞 포토존에서 반바지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광명시청
유화정 PD: 출근 때는 반바지를 입었더라도 외부 출장을 나갈 때는 미리 챙겨 온 긴바지로 갈아입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습니다. ‘공무원 출근룩 어디까지?’라는 제목의 한 영상에서 40대 남성 공무원은 “반바지는 근무 복장으로 아닌 것 같다. 솔직히 다른 남자 직원의 다리털을 보고 싶진 않다’고 말했습니다.
박성일 PD: 왠지… 하체가 유난히 가는 체형의 남성 분들도 반바지는 꺼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유화정 PD: 최근 Job Korea가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는 남성 직장인의 반바지 착용을 찬성한다는 응답이 61%, 여성 직장인의 경우는 68.5%로 모두 과반을 넘는 수치가 나왔습니다. 반면, 현재 재직 중인 직장에서 반바지 착용이 가능하다는 답변은 50.2%였고, 35.9%는 반바지 착용이 불가능하다고 답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한국 직장인들의 반바지 착용은 아직 기업 문화와 개인의 인식에 따라 다르지만, 여름철 무더위에 일부 기업들이 쿨비즈(Cool Biz) 제도를 도입하면서 반바지 착용을 허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고요. 특히 IT 업계와 스타트업은 반바지 친화적인 분위기가 강합니다.
박성일 PD: 결국 반바지를 입느냐 마느냐보다 더 중요한 건 직장의 문화가 얼마나 유연하고, 구성원 개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느냐겠는데요. 호주의 경우, 직장에서의 복장 규제는 굉장히 느슨한 편이죠?
유화정 PD: 그렇죠. 호주에서는 누군가의 옷차림을 평가하거나 간섭하는 분위기가 훨씬 덜하다는 걸 많은 분들이 느끼실 겁니다. 복장 규제는 종종 권위의 상징인데, 호주는 그런 위계 구조와 거리를 두려는 문화가 강한 편이죠.
‘어떻게 입었는가’보다 ‘얼마나 편한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죠. 여기에는 탈권위주의 문화가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복장 규제를 권위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편안함과 자율성을 더 존중하는 것이죠. 반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게으르다’ 거나 ‘성의 없다’고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날씨에 맞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으로 존중하는 면이 큽니다.
박성일 PD: 결국, 복장 하나에도 사회의 성향과 문화가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 같아요. 하지만 모든 직장이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갖긴 어렵겠죠. 어떤 직장에서는 여전히 복장 규칙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기준을 어디에 두면 될까요?
유화정 PD: 호주에서도 은행, 로펌, 그리고 고객을 대면하는 직장 같은 곳은 직장 같은 곳은 정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에 명확한 복장 규정이 없다면, 동료들을 관찰해라” 이는 즉, 주변 분위기를 잘 살피고 너무 튀지 않게 눈치껏 판단하라는 것이죠. 그리고 아무리 반바지라도 비치웨어처럼 보이지 않도록, 소재와 길이, 스타일링을 신중히 하라고 조언합니다.
박성일: 결국 반바지냐, 긴 바지냐보다 어떻게 입느냐가 중요하다는 거군요.
유화정: 맞습니다. 적절한 선택과 감각이 핵심이죠. 호주의 맨발 문화, 한국의 반바지 논쟁.. 결국 모두 ‘무엇을 입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는 문화의 언어가 아닐까요!
박성일 PD: 네, 복장 하나에도 그 사회의 분위기, 권위에 대한 태도, 자유에 대한 시선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문화로 세상을 읽는 시간 컬처인, 오늘은 직장에서의 반바지 착용 논쟁을 통해 복장과 문화의 경계를 자세히 짚어봤습니다. 유화정 프로듀서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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