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진보 학자들의 끈질긴 법정 투쟁 끝에 지난 주 전격적으로 공개가 허용된 관련 자료에 따르면 고프 휘틀람 당시 연방총리를 전격 해고했던 존 커 당시 연방총독은 “영국 왕실에 연방총리 해고 계획을 사전에 알리지 않았고 독단적 판단에 근거해 이를 추진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존 커 당시 연방총독은 고프 휘틀람 총리 해고 계획을 여왕이 사전에 알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분석됐다.
하지만 그는 연방총독으로서 고프 휘틀람 총리를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헌법적으로 분명히 보장됐는지의 여부를 영국 왕실의 관계자들과는 논의했던 사실은 확인됐다.
지난 1975년 존 커 연방총독이 고프 휘틀람 연방총리를 파면 조치한 것이 합헌적이다, 위헌적이다는 논란은 4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1975년 호주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The Australian flag flies next to a statue of her Majesty the Queen Elizabeth II at Parliament House in Canberra, Monday, July 13, 2020.
AAP
조은아PD: 1975년 11월 11일에 호주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유당으로부터 23년 만에 정권을 되찾고 질풍노도의 개혁을 추진했던 노동당의 고프 휘틀람 당시 연방총리가 존 커 당시 연방총독으로부터 파면 통보(letter of dismissal) 를 받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호주는 헌정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방총독이 연방총리를 파면하고 연방상하원을 해산하는 초유의 사건이 벌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게 됐던 것이죠….
진행자: 정치 문제 개입에 극도로 자제하고 또 조심하는 영국 여왕의 대리인 연방총독이 연방총리를 파면하는 사태로 치닫게 된 이유도 살펴보죠?
조은아 PD: 가장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하원에서의 다수 의석 확보를 통해 집권한 휘틀람 정부의 개혁안은 번번히 상원의 벽에 부딪힌데 따른 결괍니다.
1973년 집권 첫 해에만 고프 휘틀람 노동당 정권이 추진한 정부의 핵심법안 13개가 상원에서 부결되는 진기록도 남겼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이 1975년까지 이어졌고, 정부 예산안마저 부결되자 휘틀람 정부는 타협이 아닌 ‘예산전용법안’의 우회로를 택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같은 무리수가 결국 부메랑이 돼 연방총독에 의해 파면되는 파국을 맞게 됐던 것입니다.
진행자: 호주 현대사를 논할 때 고프 휘틀람 정부를 빼놓고는 얘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돈데요… 아무튼 비록 해고됐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방점을 찍은 정치 지도자였죠.
조은아 PD: 그렇습니다. 호주 역대 최고의 진보정권을 탄생시킨 주인공입니다. 그는 1972년, 25년간에 걸친 보수성향의 자유당 정권이 마침내 문을 내리고, 호주 역대 최고의 진보 정권인 노동당의 고프 휘틀람 정부를 이끌었습니다.
고프 휘틀람은 공식 취임에 앞서 연방 부총리로 지명한 랭스 버나드와 함께 총전 직후인 12월 5일 단 둘이서 내각을 구성한 채 무려 40여가지의 정부 정책안을 확정 발표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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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주일 후인 1972년 12월 19일 무려 27명의 내각 각료가 취임절차를 마쳤는데 이 가운데 단 4명의 장관만이 23년전의 노동당 정부 하에서의 각료 경험이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신출내기 정치인들이었습니다.
1973년에는 1800여 건의 사안에 대해 정부 재가가 내려졌습니다.
진행자: 고프 휘틀람 정권의 3대 원칙은 노동당의 정치적 교훈이 됐는데요…
조은아PD: 그렇습니다. 고프 휘틀람은 당시 핵심 정책안이든 비핵심 정책안이든 오직
‘평등 고양’
‘정책 수립 과정의 국민 참여’,
‘국민위상 제고 및 국내 재능 표출 보장’의 3원칙만 부합되면 모두 신속히 처리한다는 방침을 내세웠습니다.
진행자: 고프 휘틀람은 아무튼 역사적으로 중요한 궤적도 남겼다는 것만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요.
조은아PD: 네. 고프 휘틀람 정권에는 스페인 이민자 출신으로 호주 이민정책에 커다란 궤적을 남긴 ‘풍운아 정치인,’ 앨 그래스비 이민장관이 있었습니다.
앨 그래스비 이민장관의 주도하에 고프 휘틀람 정권은 결국 ‘인종차별주의 정책의 종식’을 공식화함에 따라 백호주의는 정책적으로 폐기 처분되는 듯 했고 다문화주의의 초석이 마련되는 것 같았다.
저희 SBS 탄생의 주역이기도 했습니다.
진행자: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프 휘틀람 정권 하에 아시아인들의 호주 이민 문턱은 더욱 높아졌다는 평가도 있잖습니까.
조은아 PD: 네. 라트로브 대학의 역사학자 알렉스 맥더모트 교수는 “앨 그래스비 이민장관의 획기적인 정책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고 진단했습니다.
맥더모트 교수는 “앨 그래스비 이민장관이 당시 필리핀 방문을 통해 호주의 백호주의는 사장됐다고 외쳤지만 사장된 것도 동면 중인 것도 아니었다”라는 견해를 보였습니다.
즉, 당시 노동당 정부의 혁신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호주 유입 이민자 수나 이민자 출신 국가를 살펴보면 백호주의가 사실상 존속됐음을 인식하기는 어렵지 않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대표적인 일례가 1975년 4월 사이공 주재 호주대사관이 폐쇄된 사건이었습니다.
사이공 주재 마지막 대사였던 제프리 프라이스 씨는 베트남 패망 직전까지 호주 정부에 끝까지 협조를 제공한 대사관의 현지 직원들에 대한 호주로의 망명을 허용해줄 것을 연방정부에 호소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고프 휘틀람 정권마저도 ‘아시아 이민자’ 대량유입에 대한 우려 속에 월남인 대사관 직원들의 호주 망명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던 일례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진행자: 정치적 셈법이 있던 것이겠죠?
조은아PD: 정확합니다. 1950년대의 비영국계 유럽인에 대한 대폭적인 이민문호 개방이 노동당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프 휘틀람 당시 연방총리는 이들 월남인들이 공산주의를 피해 탈주해 나온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지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레드 콤플렉스의 베트남 난민들은 결단코 진보 정당인 노동당에 표를 찍지 않을 것이라는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호주의 가장 대표적 진보정권이었던 휘틀람 정부는 존 커 당시 연방총독에 의한 호주 헌정 사상 초유의 상하양원 해산의 후폭풍에 직면하면서 정권을 빼앗기는 단명 정부로 막을 내렸습니다.







